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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馬駔傳(마장전)' / 朴趾源(1737~1805)

아즈방 2022. 1. 22. 10:26

馬駔傳 (마장전) / 박지원

 

소나 말 같은 짐승을 중간에서 흥정붙이는 중개인을 우리말로는 거간꾼이라고 한다.

이 사람이 손바닥을 치며 손가락으로 어떤 암호를 표시하면,

옛날 중국 춘추전국 시대 때 정치가 管仲이 晉나라를 覇國(패국)으로 만든 것이나,

6국의 패왕들을 웃겼다 울렸다 한 遊說客 蘇秦이 닭이나 개나 말의 피를 뽑아,

그것을 마시며 약속을 지키게 하여도 모든 제후들이 그 맹세를 믿은 것처럼,

사람들은 그 거간꾼의 말을 믿는다.

이는 이별을 할 듯한 기미만 있어도 손가락에 낀 반지를 뽑아 던져 버린다든가,

수건을 찢는다든가 하면서, 자신의 서러운 마음을 내보이기도 하고,

또 벽을 향해 돌아 앉아서 머리를 떨구고 흐느껴 자신의 진정을 믿도록 하는,

첩의 행동과도 같다.

또 자신의 간과 쓸개까지 내보이겠다는 표정으로 손을 잡고 맹세를 거듭하여,

자신이 믿을 만한 사람임을 보이려는 친구의 그것과도 같다.
그러나 이는, 그 거간꾼들이 콧마루를 경계로 부채를 세워서,

한 쪽 눈으로는 이쪽 사람에게 신호를 보내고,

또 다른 쪽 눈으로는 저쪽 사람에게 또 다른 신호를 보내면서,

자신의 생각을 믿게 하려는 술책에 불과한 것이다.

곧 달콤한 말과 협박의 말을 섞어 가며 자신의 말이 진정임을 강조하는 것이다.

강한 자를 포섭하여 약한 자를 제압하며,

합쳐진 세력은 이간질하여 흩어 버리고,

자신과 다른 생각을 가진자를 끌어들이는 것은 관중같은 覇權主義者(패권주의자)나,

소진 같은 유세객이 벌이는 권모술수이다.

 

옛날 병을 앓는 사람이 의원에게 약을 지어 와서,

본처인 아내에게 그 약을 달이라고 하였더니, 달여 온 약의 양이 늘 일정하지 않았다.

그는 본처에게 성의가 부족함을 나무란 뒤에 그 약을 첩에게 달이라고 하였다.

그랬더니 첩이 달여 오는 약은 늘 그 양이 똑 같았다.

그는 매우 고맙게 생각하며 그 첩이 약을 어떻게 달이는지 눈여겨보았다.

첩은 약을 달인 뒤에 약의 양을 살펴보고 많을 때에는 그 많은 양만큼 쏟아 버리고,

모자라면 물을 더 보태는 것이었다.

이것으로 보아 귀에 대고 나직나직하게 속삭이는 말은 믿을 수 없는 것짓말이고,

새어 나가지 못하게 당부하는 말은 깊이 사귈 수 있는 사람끼리의 교제가 아니다.

그리고 우정이 깊으니 얕으니 하고 떠드는 것은,

믿을 수 있는 친구끼리 할 말이 아니다.

 

宋旭(송욱)趙闒拖(조탑타) 그리고 張德弘(장덕홍), 이 세 사람의 거지가,

서울의 廣通橋(광통교) 위에서 세상 사람들의 교제에 대한 토론을 하였다.

 

趙闒拖가 말하였다.

"어느 날 아침 쪽박을 두들기며 밥을 빌러 서울 거리로 들어가서,

포전(布廛:옷감 가게)에 들어갔더니,

어떤 손님이 그 가게에 들어와서 옷감을 골라 들고 혓바닥으로 핥아 보기도 하고,

하늘을 향해 비춰 보기도 하더니,

그 값에 대하여서는 주인과 손님이 서로 먼저 불러 보라고 미루지 뭔가?

조금 뒤에 두 사람은 옷감은 팽개쳐 버리고,

가게 주인은 갑자기 먼 산을 바라보며,

아침 해에 비쳐 있는 구름을 향해 흥얼흥얼하며 노래를 부르고,

손님은 뒷짐을 지고 왔다갔다 거닐면서,

벽에 걸려 있는 그림을 보느라고 정신이 없지 않겠나?"

 

"그게 바로 요즈음 사람들이 교제하는 모습일세.

요즈음 사람들은 교제하는 도리를 통 모른다니까."

宋旭이 자신을 뽐내면서 이렇게 대답하였다.

 

곁에 있던 張德弘이 말을 거들었다.

"꼭두각시가 휘장을 내리는 것은 뒤에서 줄을 잡아당기기 때문일세."

 

"그게 요즘 사람들의 교제하는 실체라니까. 교제하는 도리는 그것이 아니라고."

宋旭이 또 단호히 대답하였다.

그리고 말을 이었다.

"훌륭한 사람은 교제하는 도리가 세 가지 있고,

그 교제에 대처하는 방법이 다섯 가지가 있다네.

사실 나는 그 중에 한 가지도 제대로 하지 못하였기 때문에,

서른 살이 되도록 친구 하나도 사귀지 못하였지만 말이야.   

그러나 그 도리만은 내 일찍이 들어서 잘 안다네.

그것은 팔이 안으로 굽기 때문에 술잔을 잡고 마실 수 있는 것과 같다는 거야."

 

張德弘이 말하였다.

"옛날 경서에 씌어 있지 않은가?

'학 한 마리가 깊숙한 곳에서 울면 멀리 있던 새끼가 그 소리에 화답한다.'고.

그리고 '내가 좋은 벼슬 자리에 앉으면 나와 너는 서로 얽혀서 산다.'고 말이야.

바로 이것을 두고 교제하는 도리라고 하는 모양이야."

 

宋旭이 기쁜 표정으로 말하였다.

"너야말로 벗과 교제하는 도리에 대하여 말할 자격이 있는 사람이야.

내가 조금 전에 진실한 교제에 대해 한 단면을 말하였더니,

너는 거기에서 두 가지의 단면을 이해하였단 말이야.

세상 사람들이 따라가려고 하는 것은 형세이고, 계획하려는 것은 명분과 이익이야.

술잔이 입술과 함께 약속하지는 않았지만,

팔이 안으로 굽어서 입으로 가게 하는 것은 서로가 따라가려고 하는 형세이고,

새끼가 어미 학의 울음에 화답하는 것은 형식적인 명분 때문에서가 아닐세.

그리고 좋은 벼슬을 가진다는 것은 이익이 되기는 하지만,

그것을 따르는 자가 많으면 그 형세는 분할되고,

그것을 계획하는 자가 많으면 명분과 이익에 있어서 좋은 결과가 없다네.

그리하여 세상 사람들은 형세와 명분과 이익, 이 세가지 교제 도리에 대하여

숨기고 말하지 않는 것이라네.

그래서 나는 일부러 여기에 대하여 은유법을 써서 자네에게 말하였는데,

자네는 그것을 이미 깨달았네 그려.

자네가 세상 사람들과 사귀는 데 있어서,

그 사람이 착한 일을 하는 과정에 대해서는 칭찬하지 않고, 

그 착한 일을 한 결과에 대해서만 칭찬한다면,

그 사람이 일을 하는 데 쏟은 성의가 나타나지 않게 되는 것일세.

또 그 사람의 모자라는 점을 미연에 깨우쳐 주지 않고 실행 과정에서 깨우쳐 주면,

그를 무색하게 하여 그와의 교제가 끊어지고 말 것일세.

여러 사람이 모인 곳에 가서 어떤 사람을 제일이라고 추어올리지 말게.

제일이라고 추어올리면 그 자리에는 그보다 더 나은 사람이 없다는 말이 되므로,

모인 사람들의 사기가 저하되는 것이네.

그러므로 교제를 하는 데 있어서도 처신하는 방법이 있다는 얘기지.

곧 어떤 사람을 칭찬하려거든 모자라는 점을 나타내어 꾸짖을 것이고,

그에게 기쁜 마음을 보이려거든 성난 얼굴로 그 사실을 밝히게나.

그 사람과 친해지고 싶거든 뜻을 확고하게 가지고 그것을 관찰할 것이고,

몸가짐은 수줍은 듯이 하게.

또 그 사람에게 나를 믿게 하려거든 어떤 의문점을 만들어 놓았다가,

그것이 풀릴 때까지 기다리게나.

저 열사라고 하는 이들은 비분강개하기를 잘하고,

미인이라고 일컫는 자들은 눈물이 많다네.

그리하여 영웅이라고 일컫는 열사나, 눈물을 잘 흘리는 미인은,

사람을 잘 감동시키지.

이 다섯 가지 술책은 출세한 사람들의 숨겨 놓은 비방이고,

세상을 살아가는 데 있어서 가장 훌륭한 도리라는 게야."

 

趙闒拖張德弘에게 말하였다.

"저 송군의 말은 고리타분하고 난해해서 도대체 무슨 말인지 알 수가 없네."

 

張德弘이 대답하였다.

"자네가 어찌 그것을 알겠는가?

어떤 사람이 잘한 것을 추어주기 위하여 반대로 꾸짖는다면,

그것은 더할 수 없는 칭찬이 되는 것일세.

대개 노여움은 사랑 속에서 나오고, 인정은 꾸중 속에서 싹트는 것일세.

그리하여 자기 집안 식구가 밉지 않지만 때때로 나무라는 것이야.

곧 이미 친해진 사람은 멀리 해도 더욱 친해지고,

이미 신용하는 사람은 의심을 해도 더욱 믿게 되는 것이야.

술이 거나하게 취한 깊은 밤에 사람들은 모두 잠들었지만,

둘이서 말없이 서로 바라보며 눈으로 슬픈 생각을 주고받는다면,

이 역시 감동스러운 장면이 아닌가?

이것으로 볼 때에 사람과의 교제는 서로를 알아주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고,

기쁨을 주는 것은 서로를 감동시키는 것보다 나은 것이 없지.

그런데 편협한 자의 노여움을 푼다든지 사나운 자의 원한을 풀어 주는 데 있어서는,

눈물보다 더 빠른 것은 없다는 거야.

그래서 나는 사람들과 사귈 때에 가끔씩 울고 싶기는 하지만,

눈물이 나오지 않는단 말이야.

그래서 31년 동안 온 나라를 돌아다녀 보았지만 아직까지 친구 하나 얻지못하였네."

 

趙闒拖가 말하였다.

"충성스러운 마음으로 사람들과 교제를 하고,

의리로써 벗을 사귀었다면 가능하지 않았겠나?"

 

張德弘趙闒拖의 얼굴에 침을 뱉으며 욕하였다.

"에이, 시원찮은 사람아. 그걸 말이라고 하는가?

자네, 내 말을 들어 보게나.

가난한 자는 공연히 바라는 것이 많기 때문에,

의리만 가지면 무엇이고 이룰 수 있다고 생각하는 거야.

그러면서 그는 저 높고 높은 하늘을 바라보면서 곡식이 비처럼 쏟아지기를 기다리고,

사람들의 기침 소리만 들어도 공연히 목을 석 자나 빼고,

누가 무엇을 가져다 주지나 않나 하고 기다리는 거야.

그런데 반대로 재물을 많이 가진 자는 인색하다는 소문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네.

이는 사람들이 자기에게 무엇을 바라는 것을 단념하도록 하기 위함일세.

결국 신분이 낮은 사람은 아낄 것이 없기 때문에 충성스러운 마음을 가지고,

어떠한 어려움도 마다하지 않고 감내한다네.

왜 그런가 하면, 물을 건널 때에 다 낡은 바짓가랑이를 걷어붙일 필요가 없기 때문에,

육체적인 고통쯤은 달게 감내하는 것과 같은 거야.

그러나 귀한 자는 수레를 타고도 가죽신에 덧버선을 씌워 진흙이 묻을까,

두려워한다네.

이와 같이 신발 바닥까지 아끼는데 자신의 몸이야 더 말할 나위가 있겠나?

그래서 충성이니 의리니 하는 것은 가난하고 천한 자나 지키는 일이지,

부자와 귀한 신분의 사람에게는 논의의 대상도 못 된다네."

 

趙闒拖는 그 말을 듣자 서글픈 얼굴빛을 하고 말하였다.

"이봐, 나는 차라리 이 세상에 친구를 못 사귈지언정,

그 따위 세상 사람들과의 교제는 하지 않겠네."

 

그리고 그들은 서로 쓰고 있던 갓을 부수고 옷을 찢은 뒤에,

얼굴에 흙을 바르고 머리를 풀어 흐트러뜨렸다.

그리고 새끼줄을 허리에 매고는 노래를 부르며 저잣거리로 나갔다.

 

『연암집(燕巖集)』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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朴趾源 (1737~1805)

조선후기의 실학자이자 <열하일기>를 지은 뛰어난 문장가

1737년(영조 13년) 서울 에서 출생.

어려서부터 몸이 건강하고 영민했고, 

아버지가 벼슬이 없는 선비였기 때문에 할아버지 밑에서 자랐다.

1752년 결혼한 박지원은 처삼촌인 이양천에게서 [史記]등 역사서적을 중심으로

수년 간 학문과 문장 쓰는 법을 익혔다.

1765년 과거에 실패한 뒤 오직 학문연구와 책을 쓰는 일에만 전념하다가,

박제가, 이서구, 유득공등과 학문적으로 교류를 가지기도하고,

특히 이 시기에 이덕무, 홍대용 등과 실학에 대하에 대하여 자주 토론을 벌이고,

이덕무 유득공등과는 서부지방을 여행하기도 하였다.

1777(정조1) 세도 정치가 홍국영에 의해 벽파로 몰려 목숨이 위태롭게 되자,

황해도 금천의 연암협에 은거하면서 농사와 목축에 대한 장려책을 정리 하였고,

그 곳의 지명을 따서 호를 '연암' 이라 하였다.

1780년 청나라에 사신으로 가는 친척 박명원을 따라 북경과 열하를 여행하고 돌아와

보고 느낀 것을 정리하여 [열하일기]를 썼다.

열하일기에서 정치, 군사, 경제, 천문, 지리, 문학 등,

청나라의 새로운 문물을 소개 하였는데,

평소 자신이 생각하고 있던 이용후생에 관한 생각이 잘 나타나 있다.

열하일기로 명성을 떨치긴 했지만 당시 유학자들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기도 했다.

1786년 뒤늦게 관직에 나가게 되는데,

면천 군수 시절의 경험을 바탕으로 현실개혁을 위한 포부를 이론적으로 펼쳐보인

[과농소초], [한민명전]을 썻다.

또한 박지원은 허생전, 양반전, 예덕선생전, 호질 등 10여 편의 한문소설을 남겼는데,

이 소설들을 통해서 주로 당시의 무능한 양반과 부패한 관리들을 특유의 해학으로

예리하게 풍자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