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pot of Jeju azbang

제주아즈방의 이런 저런 여러가지 관심사 창고

🤍 濟州道/├ 傳說 說話 .

고종달이(호종단) 전설.

아즈방 2022. 4. 24. 10:32

고종달의 단혈(斷血)

중국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은 북적(北狄)의 침입을 막기 위하여 만리장성을 쌓고 천명을 누리기 위하여

서씨를 보내어 불로초(不老草)를 캐어오도록 했으나, 서씨일파의 망명책(亡命策)에 속은 것이라 한다.

동이(東夷)의 지리서에 의하면 耽羅가 심상치 않아 훌륭한 인걸이 태어날 것을 염려하여,

인걸이 낳은 혈을 끊으라고 고종달(호종단 : 호종달)을 파견했다.

고종달은 풍수사(風水師)였다.

한라산 정상의 백록담에 올라가서 솨판(자석)을 딱 붙여 놓고 혈맥을 살펴보니 대정(大靜)쪽에 열부, 열사가

태어나게 되었다.

이래서 정의현(旌義縣) 동쪽에서부터 맥을 끊고 서쪽으로 가기로 작정했다.

정의현의 동쪽인 종달포(終達浦)에 상륙하여 점차로 서쪽으로 가면서 수맥을 찾으면서 끊으려 했다.

은월봉(隱月峰) 앞의 ‘넙은드르’의 동쪽에 ‘대머들’에 ‘물징거’라는 생수가 있었다.

이를 발견한 고종달은 이 물의 혈을 떠 버렸다.

이래서 물이 솟아나왔던 구멍만이 남게 되고 거기 살던 사람들은 물을 찾아 바닷가에 내려와서 지금의

終達里가 이루어진 것이다.

 

고종달이는 홍리지경(烘里地境)에 이르러 "꼬부랑 나무 아래 행기물"이라는 데를 찾아야 했다.

이 때 어떤 농부가 밭을 갈고 있었는데 백발노인이 헐레벌떡 달려와서 살려 달라고 하였다.

사연인즉, 

"저 물을 한 그릇만 떠다가 저기 있는 소길마(소질매) 밑에 놔 주십시오." 

하고 그 백발노인은 다시 사정하였다.

농부는 무슨 사연인지 몰랐으나 노인의 다급한 사정을 봐서 그렇게 해 주었다.

얼마 있더니 수맥을 찾던 고종달이가 밭가는 농부에게 다가와서 "꼬부랑 나무 아래 행기물"을 물었더니,

농부는 그런 것은 생전 처음 들어보는 곳이라, 

"나는 이곳에 50년이나 살았으나 그런 이름 가진 땅은 처음 듣는 바요." 하였다.

사실 농부도 그런 곳을 알 리가 없었다.

고종달은 고개를 갸웃거리며 그 주변을 몇번 돌다가 돌아가 버렸다.

그때 아까 떠다 놓았던 물 그룻 속에서 그 백발노인이 나와서 고맙다고 몇 번이고 머리를 조아리곤,

어디론지 사라져 버렸다.

그 노인이 바로 수신(水神)이었다.

"꼬부랑나무 아래 행기물이 지리서의 땅이 바로 소길마 밑에 놓여진 물그릇"이었던 것이다.

이래서 고종달은 흥리 지경의 수맥을 끊지 못하고 서쪽으로 가면서 지맥을 끊으러 출발했다.

 

이번에는 물혈을 잘 알아내는 개를 데리고 나간다.

개는 ‘지장새미’로 가지 않고 지장새미 밑 밭가는 사람이 놓아 둔 소길마 부근에 가서 빙빙 돌아다녔다.

‘지장새미’ 물귀신은 혈을 뜨러 오는 것을 알고 소 길마 아래 숨어 있는 것이었다.

개는 고부랑나무 아래 행기물이 바로 ‘지장새미’인 줄 알고 물혈을 찾는 것이었다.

호종단은 밭가는 농부에게 ‘지장새미’가 어디 있는지를 물어 보았다.

"지장새미 어디 있습니까?"

"저기 보이는 곳이 지장새미입니다. 어찌해서 여기 와서 그 샘을 찾습니까?"

이 말을 들은 호종단이 ‘지장새미’는 안 가고 정신없이 밭가는 곳에 찾아온 멍청한 개라고 때려 죽여 버렸다.

이래서 물혈을 더 이상 뜰 수가 없어 차귀를 거쳐 중국으로 가려다 바다에서 죽었다.

이래서 고산 앞바다의 섬을 차귀도(遮歸島)라고 부른다.

(제주도청) 

 

고종달이 

중국 진시황이 천기를 보니 제주도에 큰 인물이 많이 날 것 같아서 고종달을 보내 혈을 끊도록 했다.

고종달은 제주도의 혈을 끊으며 다녔는데,

‘고부랑 나무 행기못’에 이르러서는 물신이 숨어버려서 물혈을 차지 못하고 돌아갔다.  

 

제주도의 단맥(斷脈)전설은 꽤 여러 편이 있다.

그 중 가장 대표적인 것이 고종달형이다.

제주가 왕후지지(王侯之地)라고 하자 중국에서는 고종달을 보내 큰 인물이 날 만한 제주 곳곳의 맥을 끊게

한다.

그 때문에 제주에는 물도 없고, 큰 인물도 나지 않는 곳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다.

고종달은 제주도를 다니면서 혈을 끊기도 하고, 어떤 집안에는 발복할 명당터를 잡아주기도 한다.

즉 제주의 역사는 고종달에 의해 결정되었다는 것이다.

자연적인 조건이 열악해서 생활형편이 어려운 제주의 실정을 외세에 의해 단맥 되었으므로,

물도 귀하고 인물도 귀하게 되었다는 식으로 설명한다.

이것은 제주의 역사와 제주 사람들이 삶을 합리화하는 소극적인 면과,

그 동안 수없이 당해온 중심부 세력에 대한 저항의 심사를 형상화 한 것이다.

고종달이 중국인라는 설정은 바로 이러한 데에 기인한다.
이 설화에서 보듯이 사람들은 풍수를 신앙처럼 믿었다.

물이 나오지 않는 것도 풍수와 관련이 있고, 한 집안이나 지역의 흥망성쇠도 모두 풍수와 관련이 있다.

고종달 전설은 제주 여러 곳에 지리적 조건과 지형을 설명하기도 한다.

고종달이 혈을 끊거나 끊지 못하거나 그와 관련된 지형과 지물이 이름을 얻게 되는 것이다.

이런 전설은 설명전설이다.

어떤 것의 유래나 명칭의 유래를 설명해 주는 설화이다.
제주 고종달 전설은 이러한 설명 전설과 제주인들이 풍수를 신앙으로 믿는 풍수전설의 성격을 동시에

가지고 있다.

또한 그 속에는 혈을 끊어서 제주도를 보잘것없는 곳으로 만들어버린 중앙 정부나 외세에 대한 저항의식이

자리잡고 있기도 하다.

 

참고문헌:현길언, "설화와 제주문학", 《탐라문화》제15호, 제주대 탐라문화연구소, 1995.
제주도지편찬위원회, 《제주의 민속》Ⅲ, 제주도, 1995.

 

 

중국 진시황이 만리장성을 쌓아 나라를 든든히 해 놓았으나,

지리서를 살펴보니 제주도의 지리가 심상치 않았다.

제주도 혈들이 인걸만 수없이 나올 형상이었다.

진시황이 샘물이 없으면 인걸이 나올 수가 없으므로 고종달이를 시켜 제주의 물 혈을 끊게 했다.

고종달이는 종다리(구좌면 종달리) 바닷가로 배를 붙여 들어왔다.

 

당시 종다리는 현재의 위치가 아니다.

지금의 종다리 경내이긴 하지만, '윤드르목(隱月峯)'이라는 산 앞에 '넙은드리'라는 평지가 있는데,

이 평지의 '대머들'이라는 곳에 마을을 이루고 있었다.

이곳은 토질이 좋고 '물징거'라는 좋은 생수가 솟아 마을을 이루게 되었다.
고종달이는 제주에 오자마자, 맨 처음 이 종다리의 '물징거' 혈을 끊었다.

그래서 지금은 물은 안 나오고 물이 솟았던 구멍만이 남아 있다.

물이 끊어지자, 동네 사람들이 물을 찾아 바다 쪽으로 내려와 지금의 종다리가 이루어진 것이다.

 

옛날 중국의 왕비가 죽자, 왕이 후궁으로 미인을 얻기 위해 신하들을 사방으로 보냈다.

신하들이 미인을 찾다가 제주에까지 오게 됐다.

제주에서 천하일색을 구해 임금에게 받치니, 임금이 흡족히 여겼다.

그 여인은 백정 집안 출신이었다.
후궁이 태기가 있은 후 열 달 만에 커다란 알 다섯 개를 낳았다.

알이 날로 커지더니, 마침내 깨지면서 장군 오백이 나왔다.

오백 장군이 날마다 군사놀이를 하며 뛰어다니니, 이 장군들로 인해 나라가 망할 듯했다.

진시황이 걱정이 되어, 이 장군들을 처치할 궁리를 했다.

 

어느 날 용한 점쟁이에게 점을 쳐 보니, 제주에 있는 장군혈의 정기(精氣)를 받아 태어났으니,

장군혈을 끊어야 한다고 말했다.

진시황이 고종달이를 시켜 제주의 모든 혈을 끊게 했다.

고종달이가 맨 처음 구좌면 종다리에 도착해서, 사람들에게 이 곳 지명을 물었다.

종다리라는 말을 듣더니, 자신의 이름을 동네 이름으로 쓴다며 화를 내고, 우선 종다리의 물 혈부터 끊었다.
고종달이가 한 혈을 발견하고 정혈에다 쇠꼬챙이를 쿡 찔렀다.

그리고 마침 옆에서 밭을 갈던 농부에게 절대로 쇠꼬챙이를 빼지 말라고 당부했다.

얼마 후 백발노인이 울면서 농부에게 다가와, '저 쇠꼬챙이를 빼 달라'고 애원했다.

농부가 쇠꼬챙이를 빼는 순간 그 구멍에서 피가 솟아올랐다.

노인이 재빨리 그 피를 막자, 평소 상태로 돌아왔다.

그런 후 노인은 사라져 버렸다.

 

그 혈은 말혈(馬穴)이었다.

다행히 피를 멈추게 했으므로, 제주도에 말은 나되 피가 솟아 버렸기 때문에 제주도의 말은 몸집이 작아졌다.

고종달이가 '고부랑나무 아래 행기물'이란 물 혈을 끊기 위해 제주시 화북리(禾北里)에 이르렀다.

고종달이 지리서를 보면서 이 혈을 찾아 다녔다.

 

이때 화북리의 어느 밭에서 한 농부가 밭을 갈고 있는데, 백발노인 한 사람이 달려왔다.

그리고 농부에게 '저기의 물을 행기(놋그릇)로 한 그릇 떠다가 소 길마 밑에다 잠시만 숨겨 달라'고 애원했다.

농부가 그렇게 하자, 노인은 그 놋그릇의 물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이 노인은 수신(水神)이었다.
얼마 후, 고종달이가 개를 데리고 농부에게 다가와 고부랑나무 아래 행기물이란 물의 위치를 물었다.

농부가 알 수가 없어서 모른다고 하자, 이 곳이 맞다며 주변을 돌았다.

고부랑나무란 길마를 이름이고 행기물이란 놋그릇에 떠 놓은 물을 이른 것인데,

고종달이나 농부나 알지 못한 것이다.

 

그런데 고종달이가 데려온 개가 물 냄새를 맡고 길마 밑으로 갔다.

그러자 농부는 개가 길마 밑에 놓아 놓은 점심을 먹으려는 줄 알고 막대기로 개를 쫓았다.

고종달이가 샘물이 없자, 갖고 있던 지리서를 찢어 버리고 개를 데리고 가 버렸다.

이렇게 되어 화북리의 물 혈은 끊기지 않아 지금도 샘물이 솟는다.

그때 행기(놋그릇) 그릇 속에 담겨 살아난 물이라 해서 '행기물'이란 이름으로 불린다.  

 

표선면 토산리(兎山里)에 '거슨샘이'라는 샘물과 '노단샘이'라는 샘물이 있다.

수원(水原)은 같지만, 거슨샘이는 한라산 쪽으로 흘러가고, 노단샘이는 바다 쪽으로 흐른다.

거슨샘이란 거슬러 흐르는 샘, 노단샘이란 오른쪽으로 흐르는 샘물이란 뜻에서 나온 말이다.

이 샘물에는 다음과 같은 전설이 전해진다.

 

옛날 호종달이 구좌면 종달리로 들어와 물 혈을 끊기 시작해서 토산리의 거슨샘이와 노단샘이의

물 혈을 끊으러 내려왔다.

이때 샘을 지키던 뱀이 어떤 농부가 밭가는 데 가서 소 길마 밑에 숨었다.

호종달이는 지리서를 보고 그 밭까지 찾아갔으나, 물을 찾지 못하고, 도리어 지리서만 틀렸다고 불태웠다.
그래서 이 물은 지금까지 남아서, 오늘날 상수도를 만들어 토산리 상ㆍ하동과 세화리 주민들이 먹고,

농업용수로도 쓰인다.

이때 물 혈을 끊지 못해 남은 샘물에는 서귀포시 홍리(烘里)의 '셈이물'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