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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유배길 3 / 사색의 길 (10.1km / 4시간)

아즈방 2022. 4. 28. 20:40

사색의 길 (추사관-산방산-안덕계곡) : 10.1km / 4시간

 

추사는 원래 가시울타리 안으로 이동을 제한하는 위리안치라는 형벌을 받았지만,

실제 그것은 상징적인 조치였다.

유배인의 감시 책임은 관내 수령에게 있었던 까닭에 수령의 성격이나 재량에 따라대게는 형식에 그치는

수가 많았다.

추사는 이런 배려로 비교적 자유롭게 주변을 돌아다닐 수 있었다.

그 덕에 산방산과 물이 좋은 안덕계곡을 찾을 수 도 있었고 한라산도 오를 수 있었다.

이렇게 주변을 걸으며 추사는 유배생활로 지쳐가는 자신을 다스릴 수 있었다.

제주의 아름다운 경치와 함께하는 사색의 길. 그 길을 추사를 생각하며 걸어보자.

 

 

1. 추사와 전각

누구나 자신의 이름을 넣은 도장을 한 두 개쯤은 갖고 있다.

예술가들은 자신의 작품이라는 것을 표시하기 위해 나무나 돌, 금속 등에 인장을 새겨 작품의 한 편에

찍는데 이것을 전각 또는 낙관이라 한다.

그리고 이러한 낙관들을 모아 책으로 만든 것을 인보라 하는데,

추사의 낙관들을 모아 놓은 책을 '완당인보(阮堂印譜)'라 한다.
추사는 100개가 넘는 호를 가지고 있었으니 그 도장만 해도 셀 수 없을 정도였을 것이다.

그것들을 모아 '완당인보'를 만든 사람은 제주도 제자 박혜백이었다.
이 책에는 180여 개의 추사의 낙관이 찍혀있다.

추사, 완당을 새긴 도장에서부터, 용 모양 도장까지 다양한 모양을 담고 있다.

이러한 낙관은 추사 작품의 진위여부를 가리고, 언제 창작되었는지 추정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자신의 이름만 새겨진 딱딱한 도장에서 벗어나 자신만의 독특한 무늬를 새긴 도장을 마련해 보는 것은

어떨까 ?

 

2. 추사와 건강

추사는 유배시절 많은 풍토병에 시달려 아프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였다.

혀에 종기가 나고, 코에는 혹이 생겼으며, 눈이 잘 보이지 않아 나중에는 글씨를 쓸 수 없다고 호소

하기도 했다.
더구나 위까지 좋지 않아 음식을 겨우 삼켜도 소화가 되지 않을 정도로 유배의 고통을 톡톡히 느꼈다.
이렇게 갖은 병에 시달리면서도 추사는 9년의 유배기간을 꿋꿋이 견뎌낸다.
추사는 어떻게 이런 병들을 견뎌냈을까?

당시 영의정이었던 친구 권돈인은 추사의 건강을 위해 인삼을 많이 보내주었다.

덕분에 추사는 인삼을 무 먹듯이 먹을 수 있었다.

그리고 초의선사가 보내 준 차를 자주 마신 것도 건강에 도움이 되었다.
거기다 유배지에서 매일 바라보던 산방산의 범상치 않은 기운도 한 몫을 하였을 것이다.

산방산의 약수를 먹으면 장수한다는 전설이 내려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추사는 이렇게 유배시절을 이겨내고 71세까지 당시로써는 장수를 누린다.

 

3. 추사와 사랑

제주에 온 유배인 중에는 제주여자를 맞아 들여 유배기간동안 도움을 받는 경우가 많았다.

추사 역시 9년의 유배기간 동안 자신을 도와줄 제주여자를 곁에 두었을 법하지만 그러지 않았다.
추사는 평생 부인 예안 이씨를 사랑했다.

혼례를 올린 지 5년 만에 백년해로를 약속했던 첫째부인이 죽고,

23세에 다시 맞아들인 예안 이씨에 대한 추사의 애정은 매우 각별했다.
특히 사대부들이 평소 쓰지 않는 한글로 부인에게 보낸 편지에는 떨어져 지내는 부인에 대한 염려가

가득하다.
그런가하면 자신의 안부와 필요한 물품을 보내달라는 내용도 많다.

특히 제주의 음식이 입에 맞지 않았던지 추사는 아내에게 음식을 보내달라는 청을 자주 하였다.

하지만 그렇게 보내온 음식들은 바다를 건너는 동안 상해버리기 일쑤였는데,

추사는 이럴 때마다 예안 이씨의 정성을 안타까워했다.
추사는 무엇보다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였으나 예안 이씨는 추사가 제주에 유배 온 2년 후 세상을 뜬다.

그 소식을 미처 듣지 못한 추사는 부인이 죽은 줄도 모르고, 건강을 염려하는 편지를 계속 써서 보낸다.

아내의 죽음을 뒤늦게 접했을 때, 추사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추사는 그 통한의 심정을 애서문에 담아 부인이 가는 길을 애도했다.

 

4. 추사와 아호

추사의 호는 무려 100여개나 된다.

그래서 백호당(百號堂)이란 호까지도 생겨날 정도였다.

어떤 자료에 의하면 무려 503개나 된다고도 한다.

그 가운데 우리에게 가장 낯익은 것은 추사(秋史) 또는 완당(阮堂)이다.

본래 호를 사용하는 이유는 본 이름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속에 그 근원을 두고 있어서,

일반적으로 많아야 서너 개 일 뿐이다.

그러나 추사의 경우는 특별한 인연이나 자신의 심경에 따라 다양한 호를 사용하였다.

아마도 수백 개의 다른 이름을 통해 예술가적 면모를 과시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이곳을 걸으며 각자 자신의 면모를 드러낼 수 있는 호를 지어보는 것도 좋을 것이다.

 

5 .추사와 창천

추사는 물 좋은 창천에서 귀양살이를 하던 권진응을 부러워하면서 자신의 처지를 안타까워했다.

그래서 유배가 끝날 무렵에는 식수의 불편 때문에 물이 좋은 창천리로 한 번 더 옮긴 것으로 전해

지기도 한다.
『다경』에 이르기를 “산(山)물이 상등이고, 강물은 하등이며, 우물은 최하등이다”라고 했다.

차를 좋아했던 추사는 아마도 이러한 상등의 물을 구할 수 있었던 창천계곡에서 귀양살이하던 권진응을

부러워했는지도 모르겠다.

 

6 안덕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