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념의 길 (추사관-정난주묘-대정향교-추사관) : 8.6km / 약 3시간
추사는 "70평생에 벼루 10개를 갈아 닳게 했고, 천 자루의 붓을 다 닳게 했다(七十年磨穿十硏禿盡千毫)"고
한다.
미쳐야 미친다(不狂不及)라는 말을 몸소 실천한 추사.
그러기에 그의 인생은 집념의 일생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추사는 다방면에 걸쳐 박학했다.
그는 널리 배우고 독실히 실천하면서 사실에 의거하여 진리를 찾아야 한다고 했다.
이를 위해 제주 유배생활 동안에도 그는 글씨를 쓰고 어마어마한 양의 독서를 했다.
대정고을에 흩어져 있는 추사 관련 유적들을 둘러보며 그의 귀양살이 외로움과 추사체의 완성을 위한
집념과 인간승리를 음미하여보자.

1. 제주추사관
대정고을에 도착하면 먼저 성벽이 눈에 들어온다.
그 안쪽에 추사의 제주 유배생활을 기념하는 제주추사관이 자리하고 있다.
이 기념관에는 추사와 그의 주변 인물들의 유물이 전시되어 있다.
추사는 이곳을 감귤의 지조와 향기로운 덕을 칭송하며 “귤중옥(橘中屋)”이라 했고,
제자 강위는 스승이 10년간 가부좌를 튼 “달팽이집(蝸廬)”이라 했다.
또 제주도 제자 이한우는 시에서 “수성초당(壽星草堂)”이라 불렀다.
조선후기 최고의 인물로 꼽히는 추사가 어떻게 지냈을까 하는 생각이 들만큼,
그가 머물렀던 곳은 한 평 남짓의 비좁은 방이다.
하지만 그는 이 좁은 초가집 방구석에서 추사체라는 최고의 글씨를 완성했고,
세한도를 그려냄으로써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업적을 남겼다.
2. 송죽사 터
제주추사관 옆으로 난 길을 따라 본격적인 추사유배길이 시작된다.
예전에 ‘막은골’이라 불리던 이 주변은 동계 정온이 유배를 와서 살던 곳이다.
정온은 광해군의 이복동생인 영창대군을 죽인 자를 처벌하라는 내용의 상소를 올렸다가,
1614년 대정에 유배된다.
그는 이곳에 머문 10년 동안 독서를 많이 했는데, 대정현감이 그를 위해 서재를 지어줄 정도였다.
그로부터 200년 후 대정에 유배 온 추사는 정온이 유배 왔었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1842년 추사의 건의로 이곳에 정온의 유허비가 세워지고,
이듬해 그를 기리는 송죽사도 세워졌다.
송죽사의 현판은 추사가 썼다고 전해진다.
송죽사는 후에 송죽서원으로 격상되었다고 하는데 지금은 흔적을 찾아볼 수 없다.
이곳에 있던 유허비 역시 다른 곳으로 옮겨져 기단석만 돌담의 일부분으로 남아있다.
3. 송계순 집터
송죽사터를 조금 지나 도착하는 넓은 공터 부근은 추사가 대정에 와서 처음 머문 송계순의 집터다.
송계순은 유배인인 추사를 관리하는 첫 번째 보수주인이었다.
위리안치 형벌을 받은 추사가 이곳에 도착하자 집 주변에는 가시울타리가 쳐진다.
제주의 전통 초가집에서 추사의 외로운 유배생활이 시작되는 순간이다.
명문 집안의 후손으로 넓은 집에 살던 그가 초가집 작은 온돌방에서 생활하기란 쉽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추사는 이 작은 공간도 자신에게 과분하다고 말한다.
항상 자신만만하던 추사에게 유배는 자신의 삶을 돌아보고, 심경의 변화를 가져오게 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시대를 호령하며 세계와 소통하던 대학자로서 가시덤불 안에 갇힌 답답함을 어떻게 이겨내었을까?
지금은 초가집도, 가시덤불도 남아있지 않고, 성벽의 모습만 역사의 증인으로 남아있다.
4. 드레물
옛날 대정 지역의 식수원이던 드레물은,
‘덕이 없는 관리가 부임하면 물이 말라버리고, 덕이 있는 관리가 부임하면 물이 솟는다’는 전설이 전해온다.
추사는 좋은 물을 구하기 힘들어 고생한다는 이야기를 편지에 여러 번 하곤 했는데,
추사 유배지와 거리가 가까워서 그런지 이 곳의 어른들은 이 물이 추사가 유배시절 먹던 물이라 이야기한다.
드레물 맞은 편은 1901년 민란을 일으킨 이재수의 집터이다.
이재수는 이정재와 심은하가 주연을 맡은 “이재수의 난”이라는 영화로도 잘 알려져 있다.
이재수의 난이 일어나고 60년이 지난 1961년 민란을 일으킨 세 장두(이재수, 오대현, 강우백)를 기리는
“제주대정삼의사비”가 홍살문거리에 세웠졌다.
그 후 이 비석은 드레물 앞으로 옮겨졌다가 1997년 제주추사관 입구 맞은편에 새로운 비석을 세우면서
새 비석 앞에 묻혔다.
5. 동계 정온 유허비
동계 정온의 유허비는 광해군을 비판하는 상소 때문에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복권된 후 병자호란 때 청나라와 맞서 싸울 것을 주장하던 동계 정온의 우국충정을 기려 세워진 것이다.
이 유허비는 처음에는 송죽사가 있던 막은골에 세워졌지만,
이후 안성리 절동산으로 옮겨졌다가 보성초등학교 안쪽으로,
그리고 다시 송죽도서관터였던 지금 장소로 옮겨졌다.
제주 사람들에게 큰 영향을 준 다섯 명의 유현을 濟州五賢이라 하여 귤림서원에 배향했는데,
그 중 한 명이 바로 동계 정온이다.
정온을 비롯하여 金尙憲, 宋時烈,, 金淨, 宋麟壽를 기리는 비석이 귤림서원 옛터인 제주시 오현단에
세워져 있다.
정온은 인조반정이 일어나자 제주 생활 10년 만에 유배에서 풀려나 돌아간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를 제주로 유배 보낸 광해군은 끝내 제주도에 유배되어 생을 마감한다.
6. 한남의숙 터
보성초등학교를 따라 걸어가다 대정성벽을 지나면 오른편에 과수원이 나온다.
바로 1925년 4월 강문석이 설립한 현대교육기관인 한남의숙이 세워졌던 곳이다.
한남의숙은 대정지역의 대표적인 3대 의숙 중의 하나로,
민족교육을 실시하다 일제의 탄압으로 1928년 폐교된다.
한남의숙을 세운 강문석은 추사의 두 번째 적거지 주인인 강도순의 증손자이다.
강도순과 형제들은 추사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강문석은 그런 집안의 영향으로 사회정세나 교육에 대해 일찍부터 눈을 떴다.
7. 정난주 마리아묘
추사유배길을 걸으며 천주교 성지를 들른다면 의아해 할 사람이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정난주 마리아 성지는 추사와도 인연이 깊다.
다산 정약용의 형인 정약현의 딸인 정난주는 1801년 남편 황사영의 백서사건에 연루되어 제주도로
유배된다.
그녀는 신앙에 의지하여 37년 간의 긴 유배생활을 견디다가 추사가 유배되기 2년 전인 1838년에 눈을
감는다.
정난주 무덤은 1977년 순교자 묘역으로 단장되었다가 1994년 천주교 성지로 조성되었다.
추사는 평소 다산 정약용의 집안과 각별한 사이였다.
추사는 다산 정약용을 무척이나 존경했고 아들인 정학연, 정학유 형제와도 매우 가까운 사이였다.
이런 인연 덕분에 다산 집안의 여러 소식들을 잘 알고 있었다. 황사영 백서사건도 예외가 아니었다.
그러나 추사는 청나라와의 많은 교류를 통해 접하게 된 서양의 과학 기술을 모방하여 시행할 것을
주장하면서도 천주교와 태양력에 대해서는 반대하는 경향을 보인다.
8. 남문지못
남문지못에는 추사의 유배시절 모습을 그린 입석이 세워져 있다.
추사의 제자 소치 허련(小癡 許鍊)이 그린 <완당선생해천일립상>이다.
소동파의 모습을 그린 <동파입극도>를 모티브로 삼아 추사의 모습을 그린 이 그림은 추사의 유배시절
모습을 알려주는 귀중한 자료이다.
평소 소동파를 좋아해서 그런지 추사의 일생은 소동파와 비슷한 점이 많다.
당송팔대가 중 한 명인 소동파는 당대 최고 시인으로 높은 벼슬까지 올랐다가 정치적인 이유로 해남도
(海南島)에 유배된다.
추사 역시 탄탄대로의 벼슬길을 달리다 정치적인 음모에 휘말려 제주에 유배된다.
이렇게 공통점이 많은 소동파를 생각하며 추사는 자신의 처지를 위로 했을 것이다.
소치는 추사가 유배와 있는 동안 제주를 여러 차례 방문하여 함께 지내곤 했다.
그는 외로운 추사의 말벗이 되어주며 그림 그리기, 시 읊기, 글씨 연습 등의 가르침을 받았다.
또한 초의스님이 재배한 차를 추사에게 전해주기도 하고,
헌종대왕의 명으로 추사의 글씨를 받아 올리기도 했다.
소치는 추사의 가르침을 발판으로 훗날 남종화의 대가로 자리 잡는다.
9. 단산과 방사탑
제주 사람들은 언덕처럼 땅 위로 봉긋 솟아오른 것을 오름이라 부른다.
제주는 오름의 왕국이라 할 정도로 300개가 넘는 많은 오름이 있다.
단산(簞山)도 오름의 하나인데, 부드러운 능선을 보여주는 다른 오름과는 달리 뾰족한 모습이다.
옛사람들은 마치 박쥐가 날개를 펼친 모습이라고 하여 바굼지오름이라 불렀다고 한다.
단산은 괴이한 모습 때문에 흉산이라는 이야기가 있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나쁜 기운을 누르려고 방사탑을 세웠다.
거욱대라고도 불리는 방사탑은 마을의 한 쪽에 나쁜 기운이 있다거나 기가 허한 곳에 쌓아올린 돌탑을
말한다.
제주 곳곳에서 이러한 방사탑을 찾아볼 수 있는데,
이곳에서도 밭 사이에 세워진 방사탑을 확인할 수 있다.
추사는 유배시절 내내 단산을 바라보며 지냈을 것이다.
추사체의 특징이 괴이한 모습이라는 말이 있는데,
혹자는 단산의 괴이한 모양새가 추사체에 영향을 주었을 것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10. 세미물
단산 입구를 얼마 지나지 않아 멀리 바다가 보이고, 밭 너머로 산방산이 한 눈에 펼쳐지는 곳에 이른다.
여기서 대정향교로 걸어가다 보면 작은 돌담을 두른 샘을 만날 수 있다.
돌세미(石泉) 혹은 세미물이라고 불리는 이곳은 옛날 주변 마을에서 물을 길어 먹었던 곳이다.
단산의 옛 이름인 바굼지오름 아래에 있다고 해서 바곤이세미(把古泉)라고도 부르기도 했다.
차를 즐겨 마셨던 추사는 물에 대한 관심이 남달랐다.
유배지의 물 사정이 좋지 않아 물을 길어오기가 어렵다고 하소연하면서,
제주에 유배 온 김정이 팠던 우물이나 창천의 좋은 물을 부러워했다.
그러한 추사에게 세미물은 위로가 될 만한 샘이었다.
추사는 이곳의 물을 길어다 차를 마시며 외로운 심정을 달랬다.
유배에서 돌아온 후에도 추사는 석천(石泉)의 물소리가 그립다고 말할 정도였으니,
예전에는 까다로운 추사도 감탄할 만큼 훌륭한 물이었던 것 같다
11. 대정향교
향교는 지방 백성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세운 국립교육기관이다.
대정향교는 조선 태종16년(1416)에 세워졌고 효종4년(1653)에 지금의 자리로 옮겨졌다.
영조 48년(1772)에는 명륜당을, 헌종 원년(1834)에는 대성전을 다시 지었다.
추사가 유배생활을 할 때 이곳에서 학생들을 가르치기도 했다고 전한다.
추사는 1846년 훈장 강사공의 부탁을 받아 기숙사인 동재에 “의문당”이라는 현판 글씨를 써준다.
어쩌면 이 글씨는 추사가 유배기간 동안 별 탈 없이 살게 해준 제주사람들에게 준 보답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이 현판은 현재 제주추사관으로 옮겨 전시되고 있다.
가장 힘들었던 유배시절을 이겨내면서 예술적 성취를 이룩한 추사 김정희.
항상 마음속에 의문을 품고 진리를 찾으라는 의문당의 뜻처럼 그는 삶의 어려움을 집념의 정신으로
이겨내는 자세를 우리에게 보여주고자 했는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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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正喜 (1786년 ~ 1856년)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詩, 書, 畵는 물론, 경학, 금석학, 불교학 등의 대가.
본관은 경주, 호는 완당(阮堂)·추사(秋史)·예당(禮堂)·시암(詩庵)·과파(果坡)·노과(老果) 등이다.
한국 금석학의 개조(開祖)로 여겨지며, 한국과 중국의 옛 비문을 보고 추사체를 만들었다 한다.
그는 또한 난초를 잘 그렸다.
실학자이면서 화가, 서예가였다.
영조의 계비 정순왕후의 친족이었고, 양어머니 남양홍씨를 통해 남연군과 이종사촌간이 된다.
흥선대원군 역시 한때 그의 문하에서 수학하였다.
박제가, 정약용 등의 학자를 비롯하여 옹방강, 완원 등 청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19세기 동아시아를
주름잡은 학자이자 예술가.
하지만 그는 정치적 음모에 휘말려 제주도와 함경도 북청으로 두 번에 걸친 유배를 가게 된다.
이 절망의 시기 동안 추사는 세한도와 추사체 등을 완성하는 등 예술적 완성을 이룬다.
삼천 명에 이른다고 할 정도로 많은 제자를 두었던 그는 71세의 나이로 과천에서 조용히 삶을 마감한다.
추사연보
1786년(정조 10) 충청도 예산에서 출생.
본관 경주 김씨. 父 김노경, 母 기계 유씨, 증조할아버지는 영조의 사위 김한신.
1793년(정조 17) 8세. 이 무렵 큰아버지 김노영의 양자로 입양되어 월성위 가문의 종손이 됨.
1797년(정조 21) 12세. 양아버지인 김노경 사망. 이후 할아버지 김이주 사망.
이때부터 월성위궁의 실질적인 가장 노릇을 함.
1800년(정조 24) 15세. 한산 이씨와 혼인
1801년(순조 1) 16세. 어머니 기계 유씨 사망.
1805년(순조 5) 20세. 부인 한산 이씨 사망.
1808년(순조 8) 23세. 예안 이씨와 혼인
1809년(순조 9) 24세. 아버지 김노경과 함께 청나라 방문
1810년(순조 10) 25세. 청나라 방문시 완원, 옹방강을 만나 사제의 인연을 맺음
1816년(순조 16) 31세. 북한산 순수비 확인. <실사구시설>을 지음
1819년(순조 19) 34세. 4월 문과 급제
1823년(순조 23) 38세. 규장각 대교 제수
1829년(순조 29) 44세. 평양 고구려 석각 발견
1830년(순조 30) 45세. 아버지 김노경 고금도에 유배
1832년(순조 32) 47세. <예당금석과안록>을 지음
1836년(헌종 2) 51세. 4월 성균관 대사성, 7월 병조참판으로 제수
1837년(헌종 3) 52세. 아버지 김노경 사망
1839년(헌종 5) 54세. 형조참판 제수
1840년(헌종 6) 55세. 6월 동지부사 제수. 9월 2일 윤상도 옥사가 재론되어 제주도 대정에 유배
1841년(헌종 7) 56세. 2월 허련 제주 방문. 상무를 양자로 들임
1842년(헌종 8) 57세. 부인 예안 이씨 사망
1843년(헌종 9) 58세. 초의와 허련, 제주 방문
1844년(헌종 10) 59세. 제자 이상적에게 <세한도>를 그려 줌
1846년(헌종 12) 61세. 예산 화암사의 <화암사상량문>을 지음
1848년(헌종 14) 63세. 12월 6일 제주 유배에서 풀려남
1849년(헌종 15) 64세. 서울로 돌아와 강상에 기거
1851년(철종 2) 66세. 7월 예송논쟁으로 함경도 북청으로 유배
1852년(철종 3) 67세. 8월 북청 유배에서 풀려 경기도 과천에 기거
1856년(철종 7) 71세. 10일 10일 서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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