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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 유배길 2 / 인연의 길 (8km / 3시간)

아즈방 2022. 4. 28. 20:40

인연의 길 (추사관-오설록 녹차밭) : 8km / 3시간

 

秋史는 제주도에 갇혀 잇는 동안에도 편지를 통해, 가족, 친구, 제자들과 소통하며 세상과 인연의 끈을

놓지 않았다.

더 나아가서는 중국의 지인들과도 꾸준히 교류하며 국제적인 네트워크를 이어나갔다.

그런가하면 시를 쓰고, 차를 마시고, 뀰이나 꽃에 대해서도 남다른 호기심을 표현하며,

외로움을 이겨나간 秋史.

세월을 뛰어넘어 秋史와 인연을 맺으러 떠나보자.

 

 

1. 제주 추사관

제주에 유배와서도 추사의 독서와 학구열은 잦아들지 않았다.

역관이던 제자 이상적(李尙迪)은 추사가 원하는 귀한 책들을 청나라에서 구해 보내준다.
그 덕분에 추사는 제주에 있으면서도 세상 돌아가는 것을 누구보다 앞서 알 수 있었다.

이상적 역시 추사 덕분에 청나라에서 크게 대접받았으니, 서로에게 도움이 되는 좋은 인연이었다.
이런 이상적에게 추사는 고마움의 표시로 그 유명한 [세한도]를 그려준다.

“날씨가 추워진 뒤에야 소나무가 뒤늦게 시듦을 안다”는 [세한도] 발문으로 제자의 변치 않는 마음에

추사가 얼마나 고마워했는지 짐작할 수 있다.
[세한도]는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치다가 일제시대 추사 연구가인 후지츠카 치카시(藤塚?)에게 넘어간다.

그를 따라 일본으로 넘어갔던 [세한도]는 이를 안타깝게 여긴 손재형(孫在馨)의 노력으로 다시 우리나라에

돌아오게 된다.
추사의 국제적인 명성만큼이나 한·중·일을 두루 거치며 그 이름값을 톡톡히 한 [세한도]는 국보 제180호로

지정되어 있다.

 

2. 수월이못

이 연못은 옛날 수월이라는 관기 때문에 생겼다는 이야기가 전해 내려오고 있어 ‘수월이못’이라 부른다.

이곳에 추사가 쓴 한시들을 돌에 새겨 전시하고 있다.
추사는 유배생활의 적적함과 외로움을 시로 달랬다.

추사의 시에는 유배생활 동안 느끼는 여러 감회가 나타난다.

그는 시를 통해 사람을 만나고, 대정고을을 만나고, 제주의 자연을 만났다.

추사에게 시는 새로운 인연을 만나는 만남의 장이었다.

 

3. 추사와 감귤

추사유배길을 걷다보면 감귤 과수원을 곳곳에서 만나게 된다.

특히 노랗게 익은 귤이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귤밭의 모습은 과연 장관이다.
감귤은 조정에 올리는 제주의 대표적인 진상품이었다.
추사가 제주에 와서 가장 놀란 것이 무엇일까?

아마도 서울에서는 보기 힘든 귤을 실컷 구경할 수 있었던 것 아닐까.
추사는 매화, 대나무, 국화 등은 어디서든 볼 수 있지만 귤만은 이곳에서만 볼 수 있다고 하였다.

그는 귤의 지조와 덕을 칭송하며 자신이 살던 곳을 ‘귤중옥’이라고 부를 정도로 제주감귤을 좋아했다.
당시 제주에는 다양한 종류의 품종이 재배되고 있었고, 추사는 귤에 대한 지식도 해박하였다.

당유자를 어떻게 먹어야 달고 시원하다는 것까지 알고 있었으니 귤 전문가나 다름없다.

추사가 높이 평가했던 제주감귤. 이제 제주감귤을 먹으며 추사가 말한 지조와 덕을 한껏 느껴보도록 하자.

 

4. 제주 옹기박물관

추사의 유배지인 대정은 옛날 제주옹기를 생산해 내던 대표적인 제주옹기 집산지다.

대부분의 마을 사람들이 옹기와 관련된 일을 했을 정도였지만,

옹기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이 멀어지면서 생산을 멈추게 되었다.
최근 마을 사람들의 힘으로 옹기를 지역을 대표하는 문화로 부활시키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었다.
집 안에 간직하고 있던 옹기들을 선뜻 내놓고, 옹기를 만들던 기술을 하나, 둘씩 꺼내 놓으며 옹기에 대한

열정을 다시 한 번 키워 나갔다.

그 결과로 탄생한 것이 제주옹기박물관이다.
제주옹기박물관에는 그동안 지역주민들이 정성껏 모은 허벅, 통개, 시루 등의 옹기 관련 유물들이 전시

되어 있고, 멀지 않은 곳에 옛날 옹기를 굽던 가마인 노랑굴과 검은굴이 남아있어 제주옹기의 흔적을

느낄 수 있다.
제주옹기박물관은 앞으로 추사유배길 관련 정보도 알려주고, 유배상품도 전시, 판매하는 등 추사유배길

마을공동체 사업을 위한 센터로서 역할을 할 것이라고 한다.
제주옹기와 추사유배길의 두 가지 맛을 한 곳에서 느낄 수 있는 제주옹기박물관.

지역 주민들이 중심이 되어 제주옹기와 추사유배길을 지역의 대 표 문화상징으로 자리매김해 나갈 것이다.

 

5. 추사와 매화(매화마을)

사군자의 첫 번째 매화. 선비들은 추운 겨울에도 꽃을 피우는 매화의 고결한 지조를 높이 사 사군자의 하나로

꼽았다.
추사 역시 이런 매화를 좋아했다.

그래서 매화와 관련된 많은 시를 비롯해 “삼십만 매화나무 아래의 방”이라는 뜻의 <삼십만 매수하실(三十萬

梅樹下室)>이란 편액 글씨도 썼다.
추사의 인장을 모아놓은 완당인보에는 “매화를 생각한다”는 뜻의 아념 매화(我念梅花),

“매화의 오랜 주인”이라는 뜻의 매화구주(梅花舊主)라는 인장도 있을 정도니 매화에 대한 추사의 애정을

알 수 있다.
봄, 여름, 가을 좋은 시절 동안 묵묵히 자신을 다스리다 겨울에 꽃을 피우는 매화는,

가장 힘든 시기인 유배지에서 예술의 꽃을 피웠던 추사와 많이 닮았다.

추사는 이러한 매화를 보며 선비의 지조를 지켜나갔을 것이다.

 

6. 곶자왈

곶자왈은 제주의 용암지대에 만들어진 특이한 숲이다.

추사유배길이 지나는 구억마을, 인근에 있는 무릉, 신평, 저지마을에 이르기까지 넓은 지대에 걸쳐

곶자왈이 형성되어 있다.
제주의 허파라고 불리는 곶자왈은 여러 식물들이 함께 자라고 있어 독특한 생태계를 이루고 있다.
추사는 이 지역의 곳자왈을 지나면서 “밀림의 그늘 속에 하늘빛이 실낱만큼 보였다”고 했다.

그리고 “겨울에도 시들지않는 나무들과 사랑스러운 단풍의 모습을 보았다”고도 했다.
육지와는 다른 제주의 숲을 보며 추사는 이국적인 정취를 한껏 느꼈다.

 

7. 추사와 편지

추사의 제주 유배생활의 흔적은 그가 남긴 편지 곳곳에 묻어있다.

현재 남아있는 추사의 자료 대부분이 편지라고 할 만큼 그는 가족, 친구, 제자들과 편지로 인연을 이어

나갔다.
인편으로 한양까지 편지를 전하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더구나 파도가 높은 날은 배를 띄우지 못해 언제 소식이 다다를지 예측조차 할 수 없었다.

그럼에도 추사는 유배지에서 끊임없이 편지를 보낸다.
편지로 이어진 인연들 덕분에 추사는 유배생활 중에도 학자로서, 예술가로서 당대 최고의 위상을 유지

할 수 있었다.
유배시절의 편지들은 혼자 지내는 외로움을 달래주었을 뿐만 아니라 추사의 소중한 자산이 되었다.
사람이 살아가는데 중요한 것은 역시 사람이다.

편지를 통해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 추사처럼 그동안 가까운 지인들에게 표현하지 못했던 솔직한 마음을

편지에 담아 전해보는것은 어떨까.

더욱이 방사탑은 액운을 막아주기에 여기에 부치는 편지는 가장 큰 정성이 될 것이다.

 

8. 추사와 말

제주도하면 조랑말이 연상될 정도로 제주도와 말은 불가피한 관계다.

말을 키우기 위해 목마장들이 설치되었고 그 말들은 대부분 군마나 역마로 쓰기 위해 조정에 진상되었다.
드라마에서는 창살처럼 생긴 달구지에 갇혀 떠나는 유배인이 자주 등장한다. 추사는 어땠을까?
당시 규정을 보면 높은 관직에 있던 유배인은 말을 타고 이동할 수 있었다.

추사 역시 말을 이용하여 유배를 떠난다.

말을 타고 한양을 뒤로 한 채 제주로 떠나는 추사의 모습을 상상해 보자.
추사가 제주도에서 본 특이한 풍경 가운데 하나가 말이 끄는 방아였다.

그 모습이 신기해 추사는 “말방아”에 대한 시를 짓기도 하였다.

추사의 유배지에서 예전에 사용하던 말방아의 흔적을 찾을 수 있다.

 

馬磨 / 말방아
人十能之馬一之 / 열 사람이 할 것을 말 하나로 돌리니
三家村裏?神奇 / 대정고을에 이런 신기한 게 있구나
大機大用元如此 / 하늘의 돌아감도 역시 이런 이치이니
還笑宗風老古錐 / 선종이 공연히 애쓰는 게 우습기만 하구나

 

9. 추사와 차

추사의 차에 대한 높은 안목은 청나라 학자들과의 교류에서 얻어진 것이다.

그는 북경에 갔을 때 완원의 서재인 쌍비관에서 승설차를 맛본 후 자신의 호를 승설도인(勝雪道人)

이라고도 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축척된 추사의 차에 대한 식견과 경지는 다성(茶聖)이라 불리는 초의스님의 제다법을

완성하는데 가장 큰 영향을 주었다.
추사는 차를 구하기 어려운 귀양살이 중에도 초의스님 덕에 차를 즐겼다.

초의스님은 손수 덖은 차를 보내주기도 했고, 다섯 차례나 제주도를 직접 찾아오기도 했다.

이런 고마움 때문에 추사가 써준 글이 “일로향실(一爐香室)”이다.
“차를 좋아하는 사람은 늙지 않는다.”라고 했지만 실제 추사는 제주도에서 설사병을 차로 고치기도 했고,

차 덕에 수명을 연장하게 되었다고도 말했다.

또한 초의 스님은,

“추사공과 나는 평소 신의가 두터웠으므로 서로 사모하고 경모하며 경애하는 도리를 잊지 않았다”고

말했다.

제주도에서 차를 마시는 일은 곧 건강은 물론 추사와 초의 스님이 평생 나누었던 우정과 신의를 마시는

일이기도 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