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안 유배길 (제주목관아-성안- 목관아) : 약 3km / 1시간
'제주에 위리 안치하라 !'
한양에서 삼천리에 이르는 머나먼 길.
삼남대로를 따라 땅끝까지 간 후 다시 뱃길을 건너야 하는 제주의 유배길은 목숨을 장담할 수 없는 험난한
행군이었다.
육로로 땅끝까지 가는 길도 만만치 않았지만, 그 앞에 펼쳐진 끝없는 망망대해를 보며,
다시는 살아 돌아오지 못할 것 같은 절망감에 사로잡혔을 것이다.
일단 배에 오르면 어는 곳에 다다를지 누구도 알지 못했다.
심한 풍랑을 만나 표류해 버리지는 않을지, 암초에 걸려 배가 부서지지는 않을지,
노심초사하며 바람과 파도에 모든것을 맡기고 그저 무사히 도착하기만을 바랄 뿐이었다.
험난한 바다위에서 물결이 인도하는데로 흘러가다 몸을 가누기 힘든 뱃멀미에 정신이 혼미해질 때 쯤에
이르러 어렴풋이 한라산의 모습이 눈에 들어오고 배는 어느 순간 제주에 닿았다.
낯선 땅에 디디는 첫 발.
고독한 유배의 시작이였다.
1. 제주목관아
유배인이 제주에 도착하면 가장 먼저 향하는 곳이 바로 제주목 관아 였다.
광해군, 우암 송시열, 추사 김정희 등 당대 내로라하는 사람들도 이 곳에 들러 제주목사에게 유배인이
도착했음을 알려야 했다.
얼마 전까지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둘렀던 이들이 일개 지방 목사에게 자신의 당도를 아뢰며,
어떤 생각을 했을까?
유배인이라고 해서 제주목사가 함부로 대할 수는 없었다.
당장은 유배인의 신분이지만 언제라도 정계에 화려하게 복귀할 가능성이 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제주목사는 유배인의 생활을 음으로 양으로 도와주며 후일을 도모하곤 했다.
제주의 역사와 함께했던 제주목 관아는 일제강점기 때 대부분의 건물이 헐려 관덕정만 남아 있다가,
오랜시간 복원작업 끝에 현재의 모습을 갖추게 되었다.
매년 입춘이 되면 탐라시대부터 이어지던 문화축제인 탐라국 입춘굿 놀이가 열려 제주시청에서부터
제주목 관아까지 낭쉐(나무로 만든 소)를 몰고 가면서 한 해의 무사안녕을 빌고 있다.
2. 이 익 유배지
대부분의 유배인들은 가족을 두고 혈혈단신 제주에 내려왔는데, 이익 역시 다르지 않았다.
유배지에서 일상을 해결해야 했던 그들은 양반 체면에 직접 나설 수는 없었으므로,
뒷바라지 해 줄 제주 여자를 맞아들이기도 했다.
이는 제주사람들과 유배인들의 전략적 제휴 성격도 보여준다.
유배인은 제주의 부유한 명문가의 도움을 받아 유배생활을 수월히 할 수 있었고,
제주 사람들은 중앙정계의 높은 벼슬아치와 혈연관계를 맺어 가문의 위상을 높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익 역시 당시 제주의 명문가였던 김만일의 딸과 집안을 이룬다.
김만일은 말 사육능력이 뛰어나 나라에 많은 말을 바쳐 헌마공신이란 벼슬을 받은 인물이다.
3. 이승훈 유배지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난 이승훈은 어렸을 적 보부상에서 시작하여 뛰어난 사업수완으로 거부가 되었다가
러일전쟁 때문에 사업에 실패한다.
그러던 중 도산 안창호의 강연에 감명받아 독립운동에 뛰어 들어 신민회에 가입하고, 오산학교를 세우는 등
교육을 통한 민족운동에 앞장선다.
제주의 많은 유배인 중에 마지막으로 왔던 유배인은 누구였을까? 바로 남강 이승훈이다.
당시 안중근 의사의 사촌 동생 안명근이 서간도에 무관학교 설립을 위해 모금을 하다 발각되는 사건이
일어났는데,
일본은 이를 총독 암살을 위한 군자금 모금으로 둔갑시켜 눈엣가시였던 사람들을 모두 검거한다.
이승훈은 안명근의 명함을 가지고 있었던 이유로 제주에서 5개월간 유배생활을 했다.
4. 광해군 유배지
제주 유배인 중 유일하게 왕이었던 광해군.
그는 임진왜란이 끝나고 조선 제15대 임금으로 등극하여 전쟁으로 피폐된 나라를 복구하는데 힘썼다.
하지만 형과 이복동생을 죽게 하고, 양어머니인 인목대비를 궁에서 쫓아낸 일들에 대해 불만이 쌓이면서
결국 인조반정이 일어나 왕위에서 쫓겨나 유배되었다.
광해군은 조선의 왕 중에 가장 드라마틱한 삶을 살았다.
7년 간의 임진 왜란을 몸소 겪었고, 치열한 왕위다툼 속에 승자가 되어 무소불위의 권력을 얻었지만,
결국 반정으로인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는 야속한 운명을 맞는다.
5. 정병조 유배지
정병조는 소론 집안에서 태어났고 본관은 동래이며 자는 관경(寬卿), 호는 규원(葵園)이다.
고종때 진사시에 합격하였고, 명성황후 시해의 음모를 미리 알고 서도 방관하였다는 탄핵을 받아,
제주도로 종신 유배되었다.
명성황후를 시해한 을미사변을 일으킨 일본으로부터 신변에 위협을 느끼고 있던 고종은,
친러정권을 수립, 친일 내각 요인들을 역적으로 단죄하면서 정병조는 서주보 등과 함께 제주도에
유배된다.
감옥에 서도 서주보와 함께 지내다 1년 여만에 유배지로 옮겨 생활한다.
그의 유배지는 김윤식 유배지와 가까워 담장을 터서 아침 저녁으로 왕래하였다고 한다.
아울러 김윤식이 중심이 된 “귤원”이라는 시회에 적극 참여하며 유배생활을 보낸다.
6. 오현단
이 곳은 제주에 영향을 주었던 다섯 현인을 배향했던 귤림서원의 옛 터이다.
오현이란 다섯명의 현인, 즉 스승을 일컫는 말로, 제주에 목사로 또는 유배인으로 왔던,
충암 김 정, 동계 정 온, 규암 송인수, 우암 송시열, 청음 김상헌을 말한다.
이 중 김 정, 송시열, 정 온 세 명이 유배인이다.
제주목사 최진남은,
“한라산의 기운이 뭉쳐 구릉을 이루고, 옆에는 맑은 계곡이 흐르며, 아래로는 큰 바다가 위치하고,
주위에는 대나 무와 귤나무들이 우거져 상쾌하고 평화로우면서 넓직한 성 가운데 중심이 되는 곳”에
충암 김 정의 묘를 옮기고 귤림서원이라 하였다.
7. 김 정 유배지
22세에 과거에 장원급제하고 35세에 형조판서에 오를 정도로 엘리트였던 충암 김 정,
조광조와 뜻을 같이하여 개혁에 참여하였다가 기묘사화로 인해 금산에 유배되며,
그 후 진도를 거쳐 1520년 제주에 유배를 온다.
김 정이 거처 하던 곳은 제주성 동문 밖에 위치한 방 한 칸과 마루가 있는 초가집 이었다.
그의 유배지 주위에는 귤과 유자나무를 심은 넓은 과원이 있었다.
가을이면 귤이 노랗게 익어 황금물결을 이루곤 했는데 그는 “자못 풍경이 장관이다”라고 감탄했다.
김 정은 김양필을 비롯해 제주의 유생들을 교육하기도 했으며,
당시 제주의 모습을 자세히 기록한 제주풍토록을 남겼다.
8. 이세직 유배지
이세직의 본명은 이일직으로 민씨정권의 지시로 김옥균, 박영효의 암살을 시도했던 인물이다.
갑신정변이 삼일천하로 끝난 후 김옥균과 박영효가 일본으로 망명하자,
민씨정권은 그들을 암살하기 위해 이세직을 일본에 보낸다.
그는 가난하게 지내던 김옥균의 빚을 갚아 주는 등 호의를 베풀어 방심하게 한 후,
자객을 시켜 그를 암살하는데 성공한다.
이어서 박영효 암살을 시도했지만 사전에 발각되어 본국 으로 송환된 후,
검사로 재직 중 뇌물수수로 1898년 종신 유배형을 받고 제주에 온다.
이 곳은 옛날 사마시에 합격한 생원이나 진사들이 학문을 연마하던 사마재가 있던 곳이다.
사마재는 강독 강론과 과거 준비를 위하여 1879년에 제주목사 백낙연이 창건한 것으로,
조선 말기 유배인 이세직은 이 곳을 빌어 유배생활을 했다.
9. 서주보 유배지
민비 일파의 친러적 세력을 없애기 위해 일본공사 미우라 등이 일으킨 을미사변으로 인해,
유길준 등 친일파를 중심으로 제4차 김홍집 내각이 수립된다.
새 내각에서는 모든 방면에 손을 대어 음력의 폐지, 종두법의 시행, 우편의 개시, 건양 연호의 사용,
단발령의 시행 등을 급진적으로 추진 하였다.
그러나 민비의 참변과 단발령은 민심을 크게 흔들어 각처에서 의병이 봉기하였으며,
결국 아관파천의 계기를 마련하였고 고종은 이를 계기로 친일 내각의 요인들을 제주도에 유배 보냈다.
이 곳은 정병조, 이범주 등과 함께 제주에 종신유배된 서주보의 유배지이다.
그는 제주목 관아 감옥에서 1년 여간 제주목사의 학대를 견딘 끝에 비로소 유배지로 옮겨 생활할 수
있었다.
그는 김윤식, 정병조 등의 당시 유배인들과 함께 “귤원”이라는 시회에서 활동한다.
10. 김진구 / 김춘택 유배지
조선 후기 문신인 김진구는 숙종의 부인인 인경왕후의 오빠이다.
그는 별시 문과에 급제하고 사관이 되어 현종실록 찬수에 참여하는 등 요직을 거친다.
하지만 인경왕후가 죽고 희빈 장씨가 중전이 되자 이에 반대하는 사람들이 올린 상소에 연루되어
김진구는 제주도로 동생 김진규는 거제도로 유배된다.
유배인 중에는 가족들이 연이어 제주에 유배를 오는 경우도 있었다.
김진구의 경우 그를 비롯해 아들 춘택, 손자 덕재, 그리고 사위 임징하까지 제주에 유배를 온다.
그는 제주성내 오진의 집에서 유배 생활을 하는데 이 때 아들인 김춘택도 함께 지낸다.
김진구는 제주에서 지내는 5년 동안 이중발, 오정빈, 고만첨 등과 교류하며 학문을 전한다.
그의 가르침을 받은 다수의 제자들은 후에 문과에 급제할 정도로 뛰어난 실력을 보인다.
1694년 장희빈이 폐위되면서 김진구는 이 해 4월에 해배되어 돌아 간다.
11. 송시열 유배지
모든 것을 내려놓고 나그네가 되어 떠나는 귀양길.
벼랑 끝에 몰려 유배길에 올라야 하는 그들의 심정은 어떠했을까.
세상에 대해 원망과 절망으로 가득할 듯 하지만 오히려 묵묵히 받아 들이는 경우도 있었다.
왕세자의 책봉을 반대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1689년(숙종 15) 83세의 나이에 제주에 유배되는
우암 송시열.
그는 격정의 시대에 갖은 풍파를 견뎌낸 거두답게
“남쪽 변방에서 아홉 번 죽어도 내 한 될 것이 없고, 이 유람의 기이한 감회 평생에 제일이다”라는
소동파의 글귀를 읊으며 자신의 유배를 담담하게 받아들인다.
12. 최익현 유배지
얼마 전까지만 해도 제주에서 가장 번화한 거리였던 칠성로 한 켠에 조선 말기 대표적인 학자이며
항일투사였던 면암 최익현의 유배지 터가 있다.
관직에 있던 사람들이 유배를 오는 원인 중 다수는 권력자에 대한 비판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잘못된 일이 있어도 벌을 받을까 두려워 침묵하곤 했다.
조선말기에도 권력자였던 흥선대원군의 서원철폐와 원납전 발행에 대해 원성이 높았지만,
흥선대원군의 위세에 눌려 누구도 먼저 나서서 실정을 말하지 못했다.
이 때 최익현은 위험을 무릅쓰고 그의 실정을 비판하는 상소를 거듭 올린다.
이 상소로 인해 대원군은 물러나게 되지만 최익현 역시 제주에 위리안치 되는 처지가 된다.
최익현은 1868년(고종 5) 경복궁 중건, 당백전 발행에 따른 재정의 파탄 등 흥선대원군의 실정을 상소
하였다가 사간원의 탄핵을 받아 관직을 삭탈당했다.
1873년 동부승지 때 반(反) 대원군 세력과 제휴, 서원 철폐 등 대원군의 정책과 실정 사례를 낱낱이
열거하며 고종의 친정, 대원군의 퇴출을 주장함으로써 대원군 실각의 결정적 계기를 만들었다.
그러나 군부(君父)를 논박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제주도에 위리안치되었다가,
2년 후인 1875년에 풀려났다.
13. 김윤식 / 이승오 유배지
김윤식은 조선말기 대신으로 을미사변과 관련하여 이승오와 함께 제주에 유배되었다.
그는 당시의 유배길이었던 삼남대로가 아닌 인천에서 출발, 산지포구로 증기운선을 타고 들어온다.
제주 도착 후 40일간의 감옥생활 끝에 제주성 내 김응빈의 집에서 유배생활을 시작한다.
김윤식은 유배인의 처지이면서도 비교적 여유로운 생활을 했는데, 스스로도 이를 과분하게 여겼다.
“여러 채로 된 집은 텅 비고 넓어서 화려하며 책갑과 탁자도 깨끗 하다.
뿐만 아니라 꽃과 나무의 뜰도 있어 산책을 즐길 수도 있다.
주인은 각별히 잘 대접해주며 음식도 풍부하고 정갈하여 입에 맞다.
죄다 번화한 서울의 재미와 다를 게 없어 유배인이라는 신분을 돌아 볼 때 너무 분에 넘치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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