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 용 산
박기동 詩, 안성현 曲
부용산 오리길(산허리)에 잔디만 푸르러 푸르러
솔밭사이 사이로 회오리 바람타고 간다는말
한마디 없이 너만 가고 말았구나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붉은) 장미는 시들어지고(시들었구나)
부용산 봉우리(산허리)에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그리움 강이 되어 내 가슴 맴돌아 흐르고
재를 넘는 석양은 저만치 홀로 섰네
백합일시 그 향기롭던 너의 꿈은 간 데 없고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예 서있으니
부용산 저 멀리엔 하늘만 푸르러 푸르러
'구전가요'라고 했던 '부용산'은 슬픈 가사에 애조 띤 가락이 잘 어우러지는 노래다.
지난 시절 빨치산들이 즐겨 불렀다고 하며, 전남 지역에서는 지금도 입에서 입에서 전해지며 맥이 이어지고 있다.
80년대에는 대학생들 사이에도 꽤 널리 퍼졌다.
최근 밝혀진 바에 따르면 이 노래는 해방 직후 목포 항도여중에 근무하던 음악교사 안성현과 국어교사 박기동이
이 학교에 다니다가 요절한 여학생의 상여 나가는 소리로서 이 노래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나 가사는 그 보다 몇 해 전 박교사가 전남 보성군 벌교읍에서 그 역시 일찍 죽은 여동생을 추모하고자 쓴 것이다.
최근에 1절이 지어진지 52년만에 본의 아니게 호주에 살고있는 박기동씨에 의해 2절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벌교 사람들 사이에서 애절하게 불리워졌고,
호남인들의 마음속 아름다운 전설 처럼 입에서 입으로 불리워 졌으며,
"엄마야 누나야" 작곡가로 우리에게 친숙한 작곡가 안성현씨가 6.25전쟁 중에 방북하였다가,
917 인천상륙작전으로 목포에 돌아오지 못하고 북한에 억류된 뒤에 월북의 오해를 받는데다,
유독이 지리산 빨치산이 즐겨 불렀다는 이유로 금지곡이 되었다.
이 노래는 일본 관서대학 영문과를 졸업한 박기동 시인이 꽃같이 사랑스럽고 짧은 생애를 마친 누이동생의 죽음을
보면서 그 애달픈 심정을 시로 쓴 것이다.
부용산 사연의 주인공 故 박영애는 1923년 4월 30일 출생하여 1941년 벌교 세망동으로 시집 갔으나,
1947년 9월 6일 순천국립병원에서 사망하여 벌교 부용산에 안장하였다고 하는데,
박기동시인은 몸이 허약한 누이동생이 자식을 낳지 못한 채 24세의 꽃같은 나이에 폐결핵으로 떠난 누이동생의
짧은생애가 애달퍼 벌교사람들이 '절산'이라 부르는 부용산 자락에 누이를 묻고 돌아오면서,
"푸르디 푸른 하늘"을 다시는 바라볼 수 없는 누이동생이 안스러워 가슴을 저미며 이 시를 쓴 것이라고 하는데,
"피어나지 못한채 병든 장미는 시들어지고"라는 표현은 여동생이 결혼을 하였으나 자식을 낳지 못하고 고운 나이에
죽음을 맞이 하였기에 그렇게 표현한 것이라 한다.
다른 한편의 이야기는,
박기동 시인이 1948년 목포 항도여중 국어교사로 재직중에 문학도였던 제자 김정희(3학년)양이 폐결핵으로
죽었다 한다.
여제자의 죽음을 슬퍼하고 있을 때, 음악교사였던 안성현 선생께서 박기동선생이 써놓은 부용산 시를 보고
여기에 곡을 붙여 "부용산 노래가 완성되었다 한다.
본래 부용(芙蓉) 이라는 이름은 삼국지에 나오는 유비 현덕의 부인 이름이다.
조선시대 작자·연대 미상의 소설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에 나오는 평양 기생 이름으로 연원을 찾아볼 수 있다.
또한 부용은 중국 원산 아욱과의 낙엽 관목 이름이기도 하다.
근래에 가로 화단을 꾸미려고 심어 고운 빛깔의 큰 꽃을 볼 수 있다.
아마도 지도에서 볼수 있는 벌교 부용산은 산과 들에 많이 자라는 "부용이 많은 산"이라 하여 지어진 이름이
아닐까 싶다.
* 부용상사곡(芙蓉相思曲)
주인공인 金有聲이 평양을 유람하다 名妓 芙蓉과 백년언약을 맺고 서울에 간 사이에,
부용은 못된 신임 감사의 수청강요에 못이겨 대동강에 투신하였으나 어부의 손에 구출된다.
유성의 과거급제 소식을 접한 부용이 相思曲을 지어 보내자 그녀의 소재를 알게 된 두 사람이 만나 偕老하게 된다는
줄거리이다.
부용산은 금지곡이었나?
한동안 '부용산은 금지곡이다'라는 이야기가 많았지만, 공연윤리위원회에 따르면,
이 노래가 금지곡 명단에 들어간 적은 없는 것으로 밝혀졌다.
다만 이노래가 이데올로기의 피해가 심각했던 우리사회에서 좌익계열의 음악으로 주목받게 되자,
사람들이 공개적으로 부르는 것을 조심스러워 했을 것이다.
실제 빨치산들이 불렀었나?
빨치산의 음악은 아니지만, 빨치산들이 애창했던 것은 사실이다.
당시 빨치산 활동을 했던 생존자의 증언에 따르면 서정적인 멜로디와 가사가 자신들의 처지를 노래하는 것처럼
가슴에 와 닿아 즐겨 불렀다고 한다.
51년만의 2절 가사 탄생
애절한 가락이 가슴을 파고드는 이 노래의 근원을 밝히기 위해 호주에 거주하고 있는 작사자 박기동씨를 직접
찾아 간 연극인 김성옥(목포에서 부용산 음악회 개최)가 2절 작사를 제의,
그가 수락함으로써 2절을 완성할 수 있었다.
박기동은 "아름답고 향기로운 것들이 오래가지 못하고 빨리 사라지는 슬픔을 소재로 2절의 가사를 지었으며,
마지막은 인생무상의 감정을 느끼는 자신의 심정을 노래한 것"이라고 하였는데,
80평생에 단 두 번 밖에 울어 본 적이 없다는 그도 '돌아서지 못한 채 나 외로이 에 서 있으니' 부분을 지으면서
30여분 책상에 앉아 울음을 터트렸다고 한다.
다시 불리워질 부용산
가수 안치환에 의해 '97년 처음 음반으로 정식 발표된 이 노래는 그동안 구전으로만 전해와 상당부분의 가사와
박자가 변형되어 있었는데, 항도여중 출신 경기대 김효자 교수(93년 동국대 철학과 정교수로부터 동문회모임을 통해 건너받게
되었다고 함.)가 작곡집을 보관하고 있음이 알려지면서 원곡의 악보와 가사가 밝혀지게 되었다.
또 지난 5월 29일 목포에서 열린 부용산 음악회를 시작으로 벌교에서도 6월 26일에 부용산 음악발표회를 가졌으며,
9월에는 부용산에 기념비와 기념누각을 세우기도 하였다.
과거 부용산이라는 노래가 유행하게 된 모태가 된 두 지역에서의 이러한 노력을 필두로 부용산은 다시 대중의 곁으로
다가오고 있는데, 몇몇 지역의 노래가 아닌 같은 시대 같은 정서를 가지고 살아갔던 한국인 모두의 노래로 발전되어
가기를 바래본다.
<웹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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