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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남 고흥 - '내사랑 고흥' / 남 진

아즈방 2022. 3. 14. 18:44

내사랑 고흥

남 진 

팔영산 팔봉아 내 사랑을 꿈을 꾼다
등대불 깜박이는 나로도 선창에서
그대와 함께 한 잔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 ~ 녹동 바다는 푸르고 푸르른데
내 님 소식 언제나 올까

애간장만 태우는 구나
거금도 옥바다야

유자향 가득 담은
둥지 같은 고흥으로
어서 오시오 어서

얼릉 오시오


팔영산 팔봉아 내 사랑을 꿈을 꾼다
등대불 깜박이는 나로도 선창에서
그대와 함께 한 잔 하면 얼마나 좋을까
아 녹동 바다는 푸르고 푸르른데
내 님 소식 언제나 올까

애간장만 태우는 구나
거금도 옥바다야

유자향 가득 담은
둥지 같은 고흥으로
어서 오시오 어서

얼릉 오시오
어서 오시오 어서 얼릉 오라시요

 

고흥의  노래들 !!

고흥 사람들은 노래를 좋아한다.

어느 지역이라 해서 노래를 사랑하는 사람들이 ​고흥보다 더 적으라는 법은 없지만,

그래도 봄 철이 되면 화전 놀이로  동네 방네가 시끌 법썩하고 윤무와 가요, 서편창으로, 이 마을에서 저 마을로

요란하게 전파되고 펼쳐지다가 마침내 봄날이 지치고 지처서 그만 내빼듯이 도망치는 곳이 바로 한반도 남단에

자리잡은 섬아닌 섬, 내고향 고흥 반도이다.

이곳 보다 더 한 곳이 또 어디 있으랴~!!

 

고흥의 명산, 봉황산에 벚꽃이 망울을 터뜨려서 막 필 무렵부터,

하얀 곷 잎이 눈 송이처럼 펄펄 휘날리다 죄 떨어저서 그 하얀 벚나무가 온통 흰색에서 초록색  잎으로 범벅이 되는

변신을 할  때까지​ 봄 놀이는 계속되곤 했었다.

노랫 소리가 요란한 것은 어디 봉황산 뿐이며, 봄 날 뿐이랴 !

누군가 입영 영장을 받고 군에 입대를 하는 날에는 일주일 전부터 입대자는 여기 저기 환송막걸리 파티에 초대를

받아 불려 다녔고, 그 새에는 눈코 뜰 새 없이 바빴다,

특히 떠나야 하는 전야(Eve: 前夜)에는 친구들이 또는 후배들이 목이 터저러고 불러재끼는 ​고흥의 노래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면서 밤새도록 고흥 밤의  정막을 깨면서 이어저 나갔다,

이것은 마치 무슨 전통이나 의식처럼 통과의례가 되어 어떤 때는고흥의 노래 불러대기가 일주일 동안이나,

그것도  밤마다 계속되는 경우도 흔했다.​

나는  그런 날 밤들에는 도통 고흥의 노래들 때문에 깊은 잠을 들 수 없었다.

"~~봉황산아 잘 있느냐 다시 보자 남계수야~~!~~"​

그 뒤를 이어가는그  수 많은 고흥의 노래들~~!!

고흥의 추억,

고향 찾아 천리길,

석수포 비화,

봉황산 애가,

무너진 청춘성,

송대립 장군의 한천령,

이별의 블루스  등등

 

그러나 이들 수 많은 고흥의 노래 중에서도 김은수가 작사 작곡한 노래가 단연코 태반으로 불리어젔다.

김은수의 노래 중에서도 "고향찾아 천리길"은 으뜸가는 영순위의 단골 메뉴였다.

이러한  고흥의 노래들은, 그 때는 6.25의 상흔이 도처에 남아 있었고, 

또  전방과 지리산에서는 화약 연기가 감돌던 때라,

그 때 그 노래들은  한편으로는 너무나 처량하게 들렸고, 또 다른 한편으로는 낭만적으로도 들렸었다.

아~! 나 그 때, 10대의 어린 나이였지만 그 노래 소리들이 내 생명의 밑 바탕에 농축된 채로 남아서 이따금 뭉클

거리며 구름질 당했던 것을 잊을 수가 없다.​

그 착잡하고 미묘했던 그 때의 감정을 이제는 수습할 수 있는 망팔의 나이가 되었지만은,

그래도 그 때의 앙금이 아직도 생생하게 남아있어 도저히 잊을 수 없게 한다.​

 

그러나 그 때 동네 어른들은 젊은 애들이 한 동안 고향떠나 일선으로 전방으로 목숨을 걸고 비장한 마음으로

6.25 전쟁을 마무리하러 떠난다 하니, 귀에 못이 박힌 고흥의 노래들이지만, 그리고 솔찬히 왕 짜증도 나지만,​

그저 암시랑도(아무렇지도의 고흥 사투리) 않다는 듯이 잘도 참아 주었었다.​

내가 지금 동사에 과거 시제를 사용한 것은 고향을 떠나 온지 50여년이 흘렀기에 옛날 그 시절을 생각하며 이 글을

올리고 있기 때문이다.​

내가 고흥중을 다니던 1950년대 말이나, 또는 광주에서 고교를 다니던 1960년대 초의 여름 방학에, 

시골에 내려 와 있던 여름 밤에는 여기 저기서 나팔 소리가 요란했었다.

동정지 몰랑 아래 쪽에서는 500년 쯤 나이를 먹은 늙은 두 그루의 은행나무가 있었는데,

한 그루는 황샌(샌은 선생, 상의 고흥 사투리) 집, 또 다른 한구루는 노샌 집에 있었다.​

바로 그 두 고목 사이로 달빛이 교교히 흐르는 데,

군가가 불러대는 색소폰인가 트럼펫인가 하는 관현 악기의 감미로운 선율이 북수계(北水谿) 골짜기를 빠저 나가지

못 한 채 은행나무 가지를 헤짚고, 마침내 동정지 골목을 타고 기어 올라 와,

몰랑 위에 있는 우리집 사릿문을 거쳐 마당까지 울려 퍼저 왔다.

난 그저 매캐한 모깃불 연기 속에 덕석 위에 벌렁 나자빠진 채 누워서 달려드는 모기를 손 바닥으로 사냥질하며, 

그저 오늘 밤에는 기엉코(기필코의 고흥 사투리) 1000까지 별들을 세놓고 자려니 하고 애써 맘 먹고 있는 데,

또 저 놈의 관현악이 저렇게도 교교한 달빛을 타며 감미롭게 방해하려 들고,  

때로는 너무나 귀창을 꽝꽝 때려서 별들을 천까지는 도저히 셀 수 없게 하였다.

 

아무튼 고흥 지방은 촌 구석이다.

아니 촌의 맨 끝이었지만​ 그래도 이런 분위기 탓인지,

음악을 작곡하고, 노랫 말을 작사하는 이른바 아티스트들이 제법 더러 탄생되었다.

1950~1960년대에 ​김은수, 서병철, 박영석, 장순영, 이종옥, 이성 등이~~

물론 아까운 재능들이 서울까지 알려지지도 못 한채 고흥 반도를 맴돌다 그만  사그라젔지만.​

(후략) ...

 

* 블로그 '바로바로' (http://blog.naver.com/swlee8585) 에서 발췌 / '15. 9. 1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