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작인(鮑作人)
포작한(鮑作漢), 포작간(鮑作干), 포작인(浦作人)→보제기
바닷물 속에 들어가 조개, 미역 따위 해산물을 채취하거나 국가의 각급 제사에 쓰는 어포(魚鮑)를 떠서,
소금에 말려 진상하는 신역(身役)을 맡은 사람으로 일정한 거처가 없었음.
이들이 사용하는 포작선(鮑作船)은 가볍고 빨라 전선(戰船)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격군(格軍)으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포작인(浦作人)
조선시대 제주에서 전복과 물고기 등을 주로 잡아서 진상하는 임무를 맡은 사람.
예부터 제주의 바다에서 생산되는 특산물로는 전복·해삼·미역·옥돔 등 종류가 다양하였으나,
이런 특산물 채취는 누구나 가능한 것이 아니어서,
해산물의 진상을 위하여 포작인(혹은 포작)과 잠녀를 특별히 두어 이들로 하여금 진상에 필요한 해산물을
마련토록 하였다.
1443년(세종 25)에 제주목사로 부임한 기건(奇虔) 목사는 포작인과 잠녀의 생활을 직접 목격하고는,
제주목사로 재임하는 동안에 전복을 밥상에 올리지 못하도록 하여 제주도민들로부터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17세기 초에 김상헌이 쓴 <남사록>에는
“진상하는 전복의 수가 매우 많고 관리들은 공(公)을 빙자하여 사욕을 채우는 것이 몇 곱이 된다,
포작의 무리들은 견디지 못하여 도망가고, 익사하여 열에 두셋만 남게 되었다.
그럼에도 거둬들이는 세금은 줄지 않으니,
이웃에 홀어미가 있다 하더라도 차라리 빌어먹다가 죽을지언정 포작인의 아내가 되려 하지 아니한다”
고 기록되어 있다.
<남사록>에 의하면 수탈을 견디지 못한 제주 포작인들이 육지로 빠져나갔음을 보여준다.
포작인은 진상용뿐만 아니라 관아에서 쓰는 물품까지 담당하였다.
관아에서는 이들에게 1년에 포작인은 20필, 잠녀는 7~8필에 해당하는 많은 액수를 부과하였다.
따라서 포작인과 잠녀의 고통은 이루 말할 수가 없었으며,
제주에서는 이를 고역으로 인식하여, 6고역에 포함시키고 있다.
포작인들은 괴로움을 견디지 못하여 조선 초부터 가족을 거느리고 육지로 도망가는 현상이 빈번하였다.
더구나 여자가 많은 현상 속에서도 제주 여인들에게 ‘홀로 살지언정 포작인의 아내는 되지 않겠다’는 말이
나돌던 것을 보면 포작인의 생활이 얼마나 힘들었는지 알 수 있다.
1738년(영조 14)에 평역미를 설치하여 포작인의 역을 경감시키고자 하였으나 성과를 거두지 못하였다.
헌종 9년에 포작역을 맡기던 역을 다른 곳에서 대행하는 조치가 마련되었지만,
포작인들은 관아 선박의 사공으로 차출되는 등 고통이 사라지지 않았다.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
보제기는 제주방언으로 어부를 일컫는다.
이즈음 '해녀가 곧 제주바다'로 여겨지지만 그 바다를 일찍이 어부들이 누볐다.
할아버지의 할아버지, 아니 그보다 더 오래전부터 제주 남자들은 가까운 바다로 나가 고기와 전복, 소라 같은
해산물을 잡으며 생계를 이었다.
'🤍 濟州道 > 其他(濟州) .' 카테고리의 다른 글
제주의 로맨스를 추억해보자 (0) | 2022.06.22 |
---|---|
남극노인성(南極老人星) (0) | 2022.06.15 |
모슬포 최남단 방어축제 (0) | 2022.05.26 |
제주특별자치도, 제주문화 10대 상징물 선정 (0) | 2022.02.24 |
[문화칼럼] '우도 동굴음악회로의 초대' / 현행복 (0) | 2022.02.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