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야금병창
사 랑 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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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병창이란 연주자가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노래를 하는 국악의 한 장르로,
조선 말기로부터 시작되었으며,
1968년에 중요무형문화재 제23호로 지정되었다.
가야금병창의 달인 박귀희 명창은 가야금병창을 일러,
“가야금은 가야금대로, 노래는 노래대로 잘해야 되기 때문에 어려운 음악‘이라고 하였다.
가야금과 소리의 조화가 제대로 이루어져야 제 맛을 느낄 수 있는 음악이다.
단가를 부르면 담담하고 정감어린 화기가 감돌고,
민요를 부르면 흥겨운 춤사위가 깃들며,
판소리 대목을 부르면 소리의 다른 멋을 느끼게 해준다.
명인들의 가문에서 태어나 현재 국립국악원 민속단 수석으로 재직중인 정경옥 명창은 장월중선을 어머니로, 가야금병창을 어머니와 박귀희 명창으로부터, 성우향, 김영자, 정순임 명창으로부터 판소리 배웠다.
가야금을 연주하면서 노래하는 연주형태로 단가나 판소리 중에서 몇 대목 또는 민요를 가야금 반주와 함께 노래하는 음악으로 성악과 기악이 잘 어우러진 음악이다.
가야금병창의 발생에 관해서는 두 가지 설(設)이 전해지고 있다.
하나는 정노식의 <조선창극사>에,
"김제철(金齊哲, 순조-철종) 명창이 가야금병창제라는 '석화제' 판소리를 불렀다"는 기록이 있고, 이는 고종 때 명창 박팔괘(朴八掛)에 의해 발전되어, 吳太石 (1895-1953)에 의해 유성기음반으로 일반에게 선보였다는 것이다.
다른 하나는 박황의 <판소리 소사(小史)>에,
"현행과 같은 형식의 병창의 (金昌祖(1865-1918)가 그의 전용 고수가 갑자기 없어지자 소리를 가야금 반주에 얹어 불러본 것이 최초이다"라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견해를 종합해 보면 오태석의 유성기음반이 1910년 이전에 취입한 것으로 나타나고 한숙구(韓淑求)도 비슷한 시기에 병창을 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결코 한, 두 사람에 의해서 가야금병창이 나타난 것은 아니라고 보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장구 반주를 하기도 하고 하지 않기도 하는데 장구 반주가 없는 경우라도 가야금이 장단을 맞추어주는 효과를 낸다.
가야금은 대개 소리의 선율을 따르면서 가야금 특유의 주법을 이용하여 장단의 박을 집어 주거나, 종지 형태의 기능, 소리 없는 공간을 메꾸어 장단을 채워주며 선율 흐름에서 소리 사이의 여백을 메워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가야금병창은 주로 단가와 판소리의 한 대목이 많이 불려지고 여기에 20세기 이후에 새롭게 만들어진 신민요가 첨가된다.
오태석은 단가 중 녹음방초·호남가,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를,
강태홍은 단가 중 죽장망혜·청석령 지나갈제, 판소리 흥보가 중 제비노정기를 즐겨 불렀다고 전해진다.
대표적인 곡으로는 녹음방초·죽장망혜·호남가,
그리고 춘향가 중 사랑가·수궁가 중 고고천변·흥보가 중 제비노정기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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