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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남' / 지교헌

아즈방 2022. 8. 8. 23:06

만남 / 지교헌

 

사람은 항상 만남을 통하여 살고 있다.

죽은 사람이라면 몰라도 산 사람이 사람을 만나지 않고 산다는 것은 상상할 수도 없는 일이다.

우리는 우선 나면서부터 부모를 만나고 형제자매를 만나고 친인척과 이웃을 만날 뿐만 아니라,

거리에서나 학교에서나 직장에서나 사회에서나 항상 사람을 만나게 된다.

이따금 문 밖엘 나가지 않고 집안에 들어앉아 있어도 전화를 주고받고 편지도 주고받으면서 간접적으로

사람을 만난다.

살아 있는 사람만 만나는 것이 아니라 죽은 사람도 만난다.

자식이 조상의 제사를 지내고 공부하는 사람들이 옛 선현을 사숙하는 것이 모두 하나의 만남이니 말이다.

 

사람이 사람을 만나는 일은 우연히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어느 한 쪽에서 적극적으로 행동함으로써 이루어지기도 한다.

다시 말하면 나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만나는 수도 있지만 상대방의 의사와는 전혀 관계없이,

나의 일방적인 행동으로 만나는 수도 있다.

이리하여 우리는 전혀 뜻하지 않은 사람을 맞이하게 되기도 하고,

나의 일방적인 의사에 따라 남을 찾아가기도 한다.

 

우리의 선인들은 한결같이 만남을 소중히 여기고 살아왔다.

그들은 훌륭한 사람을 만나 배우고 싶어 하고,

훌륭한 친구를 만나 사귀고 싶어 하였으니,

훌륭한 지도자나 군주를 만나 함께 일하고 뜻을 펴고 싶어 하였다.

공자나 맹자는 훌륭한 제자를 만나는 것이 즐거웠고,

훌륭한 군주를 만나 인의(仁義)를 실현하는 정치를 펴고 싶어 하였다.

그러나 훌륭한 제자를 만나는 일이나 훌륭한 군주를 만나는 일이 결코 쉬운 것은 아니었다.

공자는 무려 70여 명이나 되는 군주를 찾아다니며 인의를 실현하려 하였지만 실패에 실패를 거듭하였다.

당시의 군주들은 인의보다는 부국강병을 원하고 수기안민(修己安民)보다는 사치와 향락을 추구하였다.

공자의 주장은 지극히 타당하지만 그것은 이상 사회(理想社會)에서 나 필요한 것으로 보였다.

현실과 이상의 만남이 어려운 것처럼 춘추시대의 군주와 공자의 만남도 어렵기는 마찬가지였다.

 

사람과 사람의 만남은 참으로 놀라우리만큼 많이 이루어지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그 많은 만남을 일일이 기억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아무런 보람도 느끼지 못하는 수가 많다.

만남도 만남 나름이기 때문이다.

기쁘고 즐거운 만남은 감던 머리를 움켜쥐고 달려나가게 하고 입에 든 음식을 뱉고 반기게 하지만,

괴롭고 귀찮은 만남은 눈에 든 가시처럼 거슬리고 비 오는 날 개를 사귀는 것처럼 싫어진다.

 

우리의 만남이 훌륭한 만남이 이루어지기 위하여는 의기상투(意氣相投)의 경지에 이르러야 한다.

단순히 만나는 것으로 그치거나 자기의 이익을 추구하는 것으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기쁨과 보람과 이상(理想)이 일치하여야 한다.

다시 말하면 존경과 우정과 애정과 가치판단이 서로 어울려야 한다.

그래야만 진정한 사제관계, 선후배 관계, 붕우 관계, 혈연관계, 친지 관계, 형제자매 관계가 이루어지게

된다.

 

중국의 고전 <열자(列子)>에는 백아(伯牙)와 종자기(鍾自期)의 만남이 소개되어 있다.

백아는 거문고를 잘 뜯었는데 백아가 높은 산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뜯으면,

종자기는 ‘좋구나, 태산처럼 높고 크도다’라고 하고,

백야가 흐르는 물을 생각하며 거문고를 뜯으면,

종자기는 ‘좋구나, 장강과 황하처럼 광대하도다’라고 하였다.

종자기는 백아의 악상(惡想)을 그대로 알아차리고 감상하였던 것이다.

하루는 백아가 태산의 북쪽 기슭에서 갑자기 소나기를 만나 바위 밑에서 비를 피하다가,

마음이 울적하여 거문고를 뜯게 되었다.

처음에는 마치 부슬비 내리는 것처럼 가볍고 느리게 연주하다가,

나중에는 마치 산이 무너지는 것처럼 무겁고 급하게 연주하였는데,

종자기는 그때그때 백아의 마음을 그대로 알아차렸다.

이리하여 백아는 거문고를 내려놓고

‘좋구나 좋구나, 그대는 나의 곡조를 들으면 나의 마음까지도 함께 듣는구나.

 나의 거문고는 그대의 상상을 벗어 날 수가 없구나’라고 하였다.

백아의 연주를 들으면 백아의 악상까지 그대로 감상할 수 있었던 종자기는 먼저 죽고 말았다.

백아는 자기의 음악을 그토록 깊이 이해하고 감상하는 친구를 잃은 슬픔을 이기지 못하여,

거문고의 줄을 끊어버리고 다시는 연주하지 않았다고 한다.

지음(知音)이니 지음인(知音人)이니 하는 말은 두 사람의 고사에서 나온 것이며,

의기가 상투하는 사람을 가르키는 말로 쓰이고 있다.

 

우리에게는 지금 진정으로 의기가 상투하는 만남이 얼마나 이루어지고 있을까.

의기상투는 고사하고 서로가 자기의 이익만을 취하기에 여념이 없고,

심지어는 상대방의 권익을 침해하면서라도 자신의 권익만을 위하여 갖는 비열한 행동을 서슴지 않는,

금수만도 못한 만남을 자행하고 있지는 않을까.

 

김정희(金正喜)는 일찍이 세한도(歲寒圖)에서,

‘권세와 이익으로 만난 사람은 권세와 이익으로 헤어진다’고 하여,

세상 사람들의 얄팍한 만남을 탄식하지 않았던가.

오늘날 우리가 살고 있는 세태는 김정희가 살던 세태보다 조금도 나을 것이 없을 것같고,

오히려 몇 곱절이나 못할 것처럼 느껴진다.

친족과 친지와 친구 사이에 사기와 횡령을 비롯한 갖은 범죄가 빈발하고,

부모가 자식을 버리고 자식이 부모를 버리는 말세적 범죄 행위가 공공연히 자행되고 있으니 말이다.

 

우리는 지금 서로의 마음을 위장하고 드러내지 않는 수가 많다.

착한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도 그대로 믿어주지 않고,

악한 마음을 드러내면 자기에게 이로울 리가 없는 까닭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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