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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14] 이방인이 본 한라산

아즈방 2022. 8. 2. 19:11

[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14]

이방인이 본 한라산

 

서복(徐福)부터 르 클레지오(Le Clezio)까지

 

‘대번’ 사로잡은 영산(靈山)

 

▲ 가을을 맞아 곱고 아름다운 빛깔로 물들어가는 한라산의 모습

-2012년 10월 13일 영실에서 촬영

 

 

최초로 방문한 이방인 ‘서복’

며칠 전 외국의 언론인들이 참여하는 한국의 유네스코 세계유산 취재 프로그램에 길안내를 맡아

제주세계자연유산을 소개하는 기회가 있었다.

해외문화홍보원이 주최하고 아리랑국제방송이 주관하는 행사로 한국의 세계유산을 전 세계에

홍보하기 위한 마련된 자리다.

7개국에서 11여명의 언론인이 참여했는데, 제주에 대해 모두들 매우 아름답다며 극찬을 한다.

 

그렇다면 과거 외국인이 본 한라산은 어땠을까.

전설 등을 토대로 할 때 한라산을 처음 찾은 이는 서복 일행이라 할 수 있다.

중국 천하를 통일한 진시황이 동남동녀 500쌍과 함께 서복을 보냈다는 곳이 영주산,

곧 한라산으로 전해지기 때문이다.

이때 서복이 한라산에서 불로초로 캐간 것이 시로미 열매라 하기도 한다.

또한 서복은 돌아가는 길에 서귀포의 정방폭포에 '서불과차(徐?過此)'라는 글귀까지 남겼다고 전해

지는데, 서귀포라는 지명도 서복이 돌아간 곳이라 하여 유래됐다고 전한다.

 

이후 몽골의 탐라지배 시기에 많은 몽골 사람들이 이곳을 다녀간 것으로 추정할 수 있으나,

이들이 남긴 탐라에 대한 기록은 아직껏 알려진 게 없어 이들이 한라산이 어떻게 보았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조선시대 이 땅을 밟은 중국이나 일본, 유구의 수많은 표류객들도 마찬가지다.

 

제주를 본격적으로 서양으로 알린 이는 네덜란드인 헨드릭 하멜이다.

동인도 연합회사의 선박에서 포수로 일했던 하멜은 1653년 8월 16일 스페르베르 호를 타고 나가사키로

가던 중 일행 36명과 함께 제주도에 표착한다.

그리고 13년 동안 조선에 억류되었다가 동료 7명과 함께 탈출,

1668년 하멜표류기로 알려진 기행문을 남겼다.

한라산과 관련하여 '나무들이 우거져 있는 높은 산이 하나 있고, 나머지 산들은 민둥산이 대부분'이라

표현하고 있다. 울창한 한라산과 나무가 없는 오름을 말하는 것이다.

 

이로부터 140여년이 지난 후 프랑스인 장 프랑수아 라페루즈(Jean-Fransois Laperouse, 1741-1788)가

제주의 남쪽 해안을 따라 동해로 올라가면서 해안을 측량하고 지도를 그려 제주를 기록으로 남긴다.

1797년 출간된 '라페루즈 항해기'(Atlas du Voyage de Laperouse)이다.

 

라페루즈 일행은 1787년 5월 제주도 남단을 5일간 지나면서 육안을 통해 제주의 농경지와 오름,

한라산, 그리고 주거지들을 세밀하게 관찰하고 묘사하고 있다.

'이토록 아름다운 모습의 섬은 찾기 힘들 것이다. 약 18~20리에 사이를 보면 약 2000m의 봉우리가

 섬 한가운데에 솟아있는데, 그곳이 섬의 저수지인 것 같다.

 대지는 완만하게 바다까지 이어져 내려오고 있고 그곳에는 집들이 계단식으로 늘어서 있다'라는

표현으로.

 

19세기 제주도에 대한 기록으로는 프랑스 외교관으로 1888년 9월 제주를 찾은 롱 베가 쓴,

「맑은 아침의 땅 조선」이라는 책이 있는데,

'서울에서 켈파르트 섬 또는 제주까지'라는 장을 통해 소개하고 있다.

당시 롱 베 일행에 대해 제주목사가 신성한 한라산에는 접근하지 말라고 강조했다는 내용이 나오는데,

당시 제주사람들이 한라산을 어떻게 여기는지 가늠해 볼 수 있는 부분이다.

 

반감과 우려속의 서양 첫 등반

한라산에 처음 오른 서양인으로는 독일의 지리학자 지그프리드 겐테(Siegfroied Genthe 1870-1904).

이재수의 난이라 불리는 신축년 항쟁이 끝난 직후인 1901년 한라산에 올라 산의 높이가 1950m임을

처음으로 밝혀내기도 했던 겐테는, 한라산 등반내용을 퀼른신문에,

'한국 지그프리드 겐테 박사의 여행기'라는 이름으로 연재하기도 했다.

 

신축년의 항쟁 직후라 서양인에 대한 반감이 심한 상황임을 고려, 소개장과 여행도중 신분보장을 위한

통행증까지 소지하고 제주를 찾았지만 당시 이재호 제주목사는 한라산 등반에 대해 호의적이지 않았다.

이유는 한라산을 신성시하는 제주사람들의 믿음을 거스르지 않겠다는 것인데,

'한라산을 오르게 되면 반드시 그 대가를 치르게 될 것'이라는 경고에서 잘 나타난다.

이어 '범접할 수 없는 고고함과 안정을 누군가가 깨뜨리는 날이면 산신령이 악천후와 흉작, 역병 등으로

반드시 이 섬을 응징할 것이며, 그렇게 되면 주민들이 와서 산신령을 괴롭히는 이방인에 대하여 항의할 것'

이라는 부연설명을 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겐테가 계속 한라산에 오르겠다고 고집하자,

목사는 무장한 강화도 수비병으로 호위케 하는 한편, 주민들에게 외국인의 상륙소식을 알려,

불필요한 마찰을 피하도록 조치를 취한다.

 

마침내 백록담에 올라 1950m임을 확인한 순간 겐테는,

"이렇게 높은 산이 바다 한 가운데 솟아 있는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런 해양기상대 위에 서면 이해할 수 없을 정도로 탁 트이는데,

 그 정도를 스스로에게도 설명하기 어렵다"라 감격해 한다.

그리고는 백인으로서는 처음 한라산에 올랐다는 자랑과 함께,

"무한한 공간 한 가운데 거대하게 우뚝 솟아 있는 높은 산 위에 있으면 마치 왕이라도 된 것 같은 느낌이

든다"라거나,

"한라산 정상으로부터 펼쳐지는 굉장한 그림을 뿌리치고 내려오기가 쉽지 않았다"라고 술회하고 있다.

 

등반후 인생 뒤바뀐 ‘이즈미’

일제 강점기에는 수많은 사람들이 한라산에 올랐고 더불어 기록으로 남겼다.

대표적인 사람이 1911년의 슈우게트(大野秋月)로,

탐라지 사본을 입수한 후 제주에서 1년 반 동안 머물며 현지조사를 거쳐 남선보굴 제주도(南鮮寶窟 濟州島)

라는 소책자로 정리했다.

슈우게츠는 이 책에서 한라산에 대해 자세하게 묘사하고 있는데,

소개에 앞서 이러한 경승지가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은 경승지를 위해서는 다행한 일로,

세상 사람들에게 알려짐으로 인해 천혜의 자연경관이 파괴됨을 우려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를 알리는 것은 고의로 경승을 해치는 것이 아니라면 신선도 그 뜻을 용서해 줄 것

이라는 믿음이라 밝히고 있다.

 

한라산 등반을 통해 인생이 뒤바뀐 경우도 있다.

일본의 대표적인 문화인류학자인 이즈미 세이이치(泉靖 一)다.

그는 경성대학 재학 당시인 1936년 1월 한라산을 등반하는데,

그의 등반대는 동계 한라산 초등정이라는 영광과 함께 한라산 최초의 조난기록을 남긴다.

눈보라 속에 대원 중 마에카와 도시하루(前川智春)가 실종된 것이다.

이때 대원들은 한라산 일대를 수색했으나 찾지 못하고 그 해 5월 한라산의 눈이 녹은 후 산장에서 불과

150m 떨어진 숲속에서 발견됐다.

 

당시 제주의 이름난 무속인이 예언한 5월에 시신이 발견되자 이즈미는 충격에 휩싸인다.

제주도에서 한 무속인으로부터 받은 문화적 충격은 전공을 당초의 일문학에서 문화인류학으로 바꾸는

계기가 되고, 이후 제주도를 본격적으로 조사해 '제주도'라는 책을 펴내기도 했다.

 

최근에 제주도와 한라산을 애정 어린 눈으로 바라보며 서양에 소개하는 사람으로는,

2008년 노벨문학상 수상자인 르 클레지오를 들 수 있다.

명예제주도민이기도 한 르 클레지오는 제주에서 직접 취재한 제주4.3의 아픔과 제주 해녀, 돌하르방 등을

소재로 한 기행문을 유럽 최대 잡지인 '지오(GEO)'의 창간 30주년 기념 특별호에 쓰기도 했다.

 

"새가 날다가 아름다운 곳을 찾았을 때 매일 오고 싶어 하는 마음으로 제주를 찾는다"는 르 클레지오.

겨울 한라산의 숲 속을 걷다가 본 작은 아기 노루를 통해 제주만의 아름다움과 희망을 봤다는 그는,

섬을 떠나려는 이 땅의 젊은이들에게 당부한다.

"섬에 산다는 것이 쉬운 일만은 아니지만 어려움을 극복하고 제주를 책임질 수 있기를 바란다"라고.

마치 성산일출봉에 첫 해가 떴을 때와 같이 젊은이들로 인해 제주가 바뀔 것이라며.

 

*글 : 강정효 / 사진작가  / 2012년 10월 15일 <제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