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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향시 '핀란디아' / 시벨리우스

아즈방 2022. 1. 24. 23:13

Symphonic Poem 'Finlandia', Op.26

교향시 '핀란디아'

 

Jean Sibelius

시벨리우스

 

Berlin Philharmonic Orchestra / Herbert von Karajan

 

New York Philharmonic / Leonard Bernstein (1965)

 

Wiener Philharmoniker / Franz Welser-Möst

 

BBC Symphony Chorus & BBC Symphony Orchestra, conducted  Sakari Oramo.

 

교향시 "핀란디아" Op.26의 7 Finlandia 1899.

* 작품해설

곡은 안단테 소스테누토의 서주로 시작된다.

우선 금관 악기가 연주하는 육중한 '고난의 동기'로 개시된다.

비극적인 동기를 받아서 목관과 현에 민중의 비탄을 상징하는 선율이 연주되지만,

그 후반은 점점 격렬하게 고조 되어, 이윽고 단호한 곡조로 전환,

알레그로 모데라토의 서주의 후반으로 들어간다.

투쟁하라고 외치는 동기가 팀파니와 나팔 등으로 날카롭게 울리고,

곡 첫머리의 '고난의 동기'가 이어지는데,

현악기에서는 약동적인 음형이 용솟음치듯 나와서,

이윽고 '투쟁에의 절규 제2의 동기'가 저음에서 힘차게 연주되자,

이를 계기로 곡은 폭발적으로 고조된 힘찬 주부로 들어간다.

두개의 '투쟁에의 절규'의 모티브가 서로 짜 맞추어져서 곡의 흥취를 돋구는데,

또 하나의 짧고 새로운 동기, 탄짼베르에 의하면 '축제에의 동기'도 곁들여져서,

압정에 대한 투쟁의 미래를 암시하고 있다.

이 격렬한 투쟁이 클라이막스를 구축하는데,

주부의 여기 까지는 교대로 되풀이 된다.

그후 크레셴도로 썰물이 빠지듯이 멀어지면,

이어서 최초의 목관 악기에 이어서 현에 의한 찬가풍의 선율이 흘러나온다.

이 주제는 민요풍의 정취를 지니는 것이기도 하여서,

민요에서 빌려온 것이라고 생각된 일도 있었으나,

영국의 시벨리우스 연구가 로자 뉴마치(Rosa Newmarch,1857∼ 1940)가

작곡자에게 물었을 때 작곡자는 부정 했다고 한다.

가사를 붙여서 '핀란디아 찬가'라 하여 노래로 불려지는 것은,

극음악으로서 이 작품이 발표된 후에, 시인 코스켄니에미가 이 부분에 가사를 끼워

넣은 것이므로, 원래 이 선율은 민요는 아니라고 하는 쪽이 맞다.

이 평화로운 찬가가 두 번 연주된 뒤,

재차 두 개의 '투쟁에의 모티브'와 '축제의 모티브' 가 곡의 고조를 부추겨,

종말의 클라이막스 속에, 후에 '핀란디아 찬가'로 된 선율의 일부를, 금관 악기가

고음으로 연주하여 힘찬 피날레가 시작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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핀란드는 13세기경부터 19세기 초까지 스웨덴의 지배하에 있던 대공국이었으나,

1808년 러시아의 핀란드에의 침공을 스웨덴이 격퇴하지 못했기 때문에,

1809년 이후로는 러시아의 속국이 되어 있었다.

그러나 완전히 영토화 되었던 것은 아니고,

처음에는 스웨덴 시대로부터 이어왔던 대공국으로서의 대우를 유지했으나,

러시아황제 니콜라이 1세(1825~55년)의 시대 이후, 핀란드의 자치권이 침해당해

오다가, 니콜라이 2세(1894~1917)의 시대에 이르러서는 마침내 핀란드의 자유는

박탈당하여, 러시아의 속령화 정책이 강제로 추진되었다.

그 때문에 핀란드에서는 애국 독립 운동이 격렬하게 고조되었다.

이 운동으로 말미암아 갖가지 행사가 벌어졌는데,

그 중의 하나로는 문화적 행사를 가짐으로써 국민의 애국열을 높이고,

나아가 독립 운동의 자금을 모금하려는 시도가 일어났다.

그 한 가지로 민족적 역사극 '옛부터의 정경'이 상연되게 되었다.

1899년의 일이었다.

시벨리우스는 음악가로서 이 연극의 상연에 참가했다.

이 희곡을 위하여 쓴 음악은 각 장면을 위한 전주곡과 대사의 배경 반주음악,

그리고 힘찬 피날레였다.

극음악에서 후에 '역사적 정경, 제 1'(직품 25)와 교향시 '핀란디아'가 만들어졌다.

작품 속에 담겨진 열렬한 애국심을 오늘 날에는 누구든지 금방 감지할 수가 있지만,

처음 발표 당시에는 청중도 비평가들도, 이 곡의 의미를 잘 몰랐었던 것 같다고,

시벨리우스 연구가 칼 에크만(Karl Ekman)은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곧 청중은 이 작품 속의 뜨거운 애국심을 알아들었다.

이것을 눈치 챈 러시아 관헌은, 핀란드 국내에서 이 곡의 연주를 불온하다 하여,

금지시키고 말았다.

그러나 러시아의 눈이 미치지 않는 나라에서는, 다른 타이틀로 바꾸어서 러시아의

눈을 피해 연주한 일이 있었다.

그리고 이 교향시의 중간부의 선율에 베이코 코스켄니에미(Veikko Koskenniemi)가

시를 써넣어 '핀란디아 찬가'라는 합창곡으로 만들었다.

'오, 핀란드여 보아라 너의 날이 밝아오는 것을'이라는 가사로 시작된다.

이 곡은 오늘날 핀란드의 준 애국가처럼 애창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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얀 시벨리우스(Johan Julius Christian Sibelius / 1865~1957)

핀란드 출생

작곡가, 대학 교수

시벨리우스는 러시아 통치하의 핀란드에서 핀란드어로 가르치는 최초의 학교였던

핀란드 교원양성학교에서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그는 핀란드의 문학, 특히 그에게 있어 지속적인 영감의 근원이 되었던

핀란드의 신화적인 서사시'칼레발라(Kalevala)'를 접하게 되었다.

<포횰라의 딸 Pohjola's Daughter><루온노타르 Luonnotar> 등을 포함한 그의

많은 교향시들이 이 서사시에서 비롯되었다.

법률가가 되려 했으나, 법률 공부를 중단하고 음악에만 전념했다.

처음 그는 바이올린 연주자가 되려고 했다.

베겔리우스의 지도를 받아 많은 실내악곡과 기악곡을 작곡했다.

자신의 음악 활동을 위해 원래의 세례명 대신 '얀'이라는 이름을 사용했다.

20대 중반에 핀란드를 떠난 그는 베를린과 빈에서 계속 공부했으며,

그곳에서 작곡가인 로베르트 푹스와 카를 골트마르크에게서 사사했다.

핀란드로 돌아오자마자 발표한 그의 최초의 대규모 관현악 작품 '쿨레르보 교향곡'

(Kullervo Symphony. 1892)은 큰 감흥을 불러일으켰다.

이 작품과 그 뒤를 잇는 작품들인 <엔 사가 En Saga>·<카렐리아 Karelia>·

<4개의 전설 Four Legends>로 그는 핀란드의 대표적인 작곡가로 부상했다.

<교향곡 1번 E단조〉(1899)를 작곡하기 이전인 1897년 핀란드 의회는,

시벨리우스의 재능을 인정하여 그에게 연금을 지급하도록 의결했다.

그의 교향시 〈핀란디아 Finlandia〉는 1899년에 작곡되어 1900년에 개정되었다.

20세기의 첫 10년 동안 시벨리우스의 명성은 대륙을 관통했다.

학생으로서 헬싱키에서 시벨리우스와 친교를 맺었던 피아니스트이자 작곡가 페루치오 부조니는 베를린에서

<교향곡 2번 D장조〉(1901)를 지휘했고, 영국의 작곡가 그랜빌 밴톡은 〈교향곡 3번 C장조〉(1907)를 의뢰했다.

이 작품에서 시벨리우스는 2번 교향곡과 〈바이올린 협주곡 D단조〉(1903)와 같은 민족적 낭만주의에 등을 돌리고

 〈엔 사가〉와 〈교향곡 4번 A단조〉(1911)에서처럼 더욱 철저하고 단호한 양식을 취했다.

제1차 세계대전 이후 그의 가장 위대한 작품들인 마지막 3개의 교향곡과 <타피올라 Tapiola>(1925)를 출판했지만 말년에는 긴 침묵에 빠졌다.

8번 교향곡(1930년대초에 연주하기로 되어 있었음)과 심지어는 9번 교향곡이 있다는 설이 있지만 발견되지는

않았다.

그가 죽은 후 그의 자필 악보는 하나도 발견되지 않았다.

1930년대에는 영국의 세실 그레이와 컨스턴트 램버트, 미국의 올린 다운스 등의 작가들 덕분에 시벨리우스에 대한

인기가 유행처럼 번져갔다.

이러한 유행에 대한 다음 세대의 반동에도 불구하고 시벨리우스는 음악 대중에 대한 확고한 영향력을 견지했다.

비록 그의 음악적 영감이 스칸디나비아의 경관과 내밀한 연관이 있다고는 해도,

시벨리우스를 대뜸 '자연시의 시인'쯤으로 기억하는 것은 터무니없다.

교향시와 7곡의 교향곡에서 성취한 업적은 주로 형식에 대한 탁월한 섭렵에 기인한 것이다.

3번 교향곡의 1악장은 하이든이나 모차르트 교향곡의 1악장에서 볼 수 있는 구조적 명료성을 가지고 있지만,

유기적 총체성과 음구조의 구축은 오히려 그 모델들을 능가하고 있다.

그의 천재성의 비밀은 이러한 유기적 구조물의 구축에 있는 것으로 평가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