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여름, 그리고 山 / 정 종
여름 그 싱그런 7월이 금빛나래를 활짝 열고 사방에 내려앉았다.
플라타너스 잎새마다 반짝반짝 드실대는 땡볕,
어느 시원한 탁자 위에선가 유리 그라스를 찰찰 넘치는 바다,
밀치고 밀려오는 새파란 파도,
천길만길 깊어지고 짙어지는 山ㆍ山 !
무한히 푸르른 젊음,
그 성하(盛夏)의 계절에 수필(隨筆) 이제(二題)를 엮어본다.
山은 山이로되 계절 따라 山은 하나가 아니다.
흡사 금강산을 봄엔 금강(金剛), 여름엔 봉래, 가을엔 풍악,
겨울엔 개골이라고 부르듯,
계절이 뚜렷한 우리나라의 山들은,
그것이 중금강(中金剛)이건 소금강(小金剛)이건 대금강(大金剛)처럼,
비록 이름은 없을지라도 그에 못지않게 계절산으로서의 특징을 그 정도에 따라 지니고 있다.
山의 나라인 한국의 그 뚜렷한 계절이라는 것도 실은 山에서 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계절이 바뀌고 온다 해도 그가 오면 어디서 오고 가면 또 어디로 갈 것인가.
山에서 오고 山에서 자라고 山에서 시드는 것이 한국의 밝고 맑은 계절인지도 모른다.
山과 山으로 이어지고 앞동산 뒷동산으로 에워싸여진 한국은,
그래서 더욱 풍성하고 화려한 山을 가지게 되는것인지도 모른다.
한국의 山은 계절 따라 산용(山容)과 산체(山體)와 산정(山情)에 변화를 가져옴으로써 네 배로 늘어난다.
금강산(金剛山)이 네 개이듯 설악산도 네 개, 지리산도 네 개, 한라산도 네 개,
북한산(北漢山)도 남산(南山)도 네 개가 되겠기 때문이다.
이래서 저래서 한국은 山잔치의 나라가 되나보다.
이 푸짐한 山의 명산지(名産地) 한국 땅,
그 절반밖에 안 되는 좁은 땅에서 山아니면 갈 데가 어디며 또 갈 데가 어디란 말인가.
이 38선으로 허리가 잘린 이 갑갑하고 답답한 조국에,
저 아라비아나 알제리처럼 山이 없었더라면,
갈 곳이 어디며 설 땅이 어디란 말인가.
모조리 山으로 내맡겨 남은 평지(平地)라야 보잘 것 없고,
삼면(三面)이 바다라야 이리 저리 잘리고 먹혀서,
마음 놓고 노닐 데라곤 다도해(多島海)정도이고 보면,
그래도 참을 데라곤, 그래도 크게 숨 쉴 데라곤,
그래도 마음 놓고 숨을 데라곤,
그래도 세계 일국의 조국의 하늘의 아름다움을 우러러 볼 데라곤,
이 땅에 태어났음을 신(神)에게라도 감사할 수 있을 데라곤,
그래도 오염(汚染)되지 않은 생수(生水)를 한 모금이라도 안심하고 마실 수 있는 데라곤,
그래도 찬란했던 3천년 문화의 흔적이라도 더듬어 볼 수 있는 데라곤,
그래도 나무다운 나무가 몇 그루나마 남아있고,
금수강산의 옛 모습의 약간이나마 유물처럼 남아서,
예가 금강산(金剛山)의 나라인 것을 그래도 느끼게 하는 데라곤,
山밖에 없다.
그래서 山으로 가고 또 山으로 가야하는 것이지만,
개발(開發)의 미명하(美名下)에 하나밖에 남지 않은 한국인의 안식처가,
온통 쑥대밭이 되어가고 있으니,
조국(祖國)을 또 한 번 잃어가는 감회가 짙어,
한국인치고 또 산악인(山嶽人)치고 어찌 슬프지 아니하랴.
슬퍼지고 안타깝고 메스껍고 아니꼽고 서글퍼지면 山에 가라고 했는데,
山이, 또 송충이떼들에 의하여 좀먹어 가고 있으니,
그것이 낙산자(樂山者)들의 슬픔이 아니고 무엇이겠느냐 말이다.
하나 절망은 아직 이르리라.
타다 남은 山의 원형(原形)이 있고,
미처 침해되지 않은 山의 원용(原(容)이 있고,
산악인(山岳人)들의 발굽으로부터 어쩌다가 제외된 山의 원상(原狀)이 있다.
사람을 피하여 山에 가면 아직도 밟지 않은 수풀이 있고,
태고(太古)를 간직한 고목(古木)과 원시림이 사람들의 접근을 거부하는 山의 위용(威容)이 있다.
이런 델 찾아가고 발견하고 탐험하는 데는 여름과 여름山이 안성맞춤이리라.
山의 신입생도, 山의 정년퇴직생도,
손쉽게 찾게 되는 山이 여름山인 것도 이 때문이다.
여름이라고 깔보아선 안 된다.
한 여름에 소백산(小白山)엔 우박으로 동사자(凍死者)가 생긴 적이 있으며,
폭풍우 속에서 산체(山體)마저 요동하는 한라산(漢拏山)의 위력 또한 대단하다.
山을 알고 山을 익힌 똑똑한 리더들 따라 그에게 절대 복종하는 미덕 속에서,
山을 얕보지 않는 충분하고도 필요한 잡비만 갖춘다면,
山의 즐거움은 받아놓은 밥상 격이 될 것이다.
알피니스트의 룩삭 속에는,
반드시 책(冊)과 원고지와 편지지와 스케치북과 연필이 들어가야 한다.
이런 걸 빠뜨리도록 버려두는 리더는 무식장이며,
아직 산악인으로서의 교양이 덜된 이라고 일컫지 않으면 아니 된다.
山을 체력으로 오르는 것으로만 아는 이는 山의 초년병일 뿐이다.
山은 체력과 더불어 심력(心力)으로, 그리고 지력(智力)으로 오르는 것이다.
이 점이 바로 등산행위(登山行爲)가 일반 여타의 스포츠와 같으면서도,
전연 다른 점이다.
산정(山頂)엔 신(神)이 있고 시(詩)가 있고,
진리가 있고, 미(美)가 있고, 성(聖)이 있다.
신화와 문학과 철학과 미술과 종교가 예서 생긴다.
위대한 알피니스들은 위대한 산악문인(山岳文人)이기도 하다.
어느 다른 스포츠에 그 엄청난 전문 서적들이 있는가를 보라.
다른 분야의 저서들은 외인(外人)들이 쓰는 것이 보통이지만,
산악(山岳)에 관한 한 본인들이 쓰지 않으면 되지가 않는다.
체험이 바닥에 깔려야하기 때문이다.
체험만 가지고도 안 된다.
사고력(思考力)과 문필력文(筆力)이 동반해야 한다.
따라서 山은 결코 다리와 손으로만 오르는 것이 아니고,
그 이전에 가슴으로, 그리고 최후엔 머리로 오르는 것이다.
등정(登頂)으로 산행(山行)이 끝나는 것이 아니고 완전 귀소(歸巢)로 끝나듯,
차원(次元) 높은 산행은 산체험(山體驗)을 추체험(追體驗)으로 재구성하고,
원고지 위에서 한 번 재현되고 정리됨으로써 비로소 끝나는 법이다.
이 점 일체가 다른 스포츠와는 그 세계가 다르다.
글로써 마음 위에서 또 한 번 오르지 않는 산행은 다른 스포츠와 다를 것이 없다.
알피니즘의 자랑은 아무래도 고차원의 저 산상(山上)에 있나보다.
정 종 / 佛敎大(불교대)교수ㆍ철학.
'🤍 歲月은 지금 > 7 월 .' 카테고리의 다른 글
'7월을 노래하자' (7月頌) / 안병욱 (0) | 2025.07.01 |
---|---|
7월의 인사말 (3) | 2025.07.01 |
수필 - '7월의 바다' / 안병욱 (0) | 2024.07.27 |
詩 - '7월의 바다' / 박우복 (0) | 2024.07.27 |
詩 - '매미' / 박영춘 (4) | 2024.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