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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文 學/隨筆 .

'風蘭' / 李秉岐 (1891~1968)

아즈방 2022. 1. 24. 23:18

風蘭 / 이병기

 

나는 蘭을 기른 지 20여 년, 20여 종으로 30여 盆까지 두었다.

동네 사람들은 나의 집을 화초집이라기도 하고, 난초 병원이라기도 한다.

화초 가운데 난이 가장 기르기 어렵다.

난을 달라는 이는 많으나, 잘 기르는 이는 드물다.

난을 나누어 가면 죽이지 않으면 병을 내는 것이다.

난은 모래와 물론 산다. 거름을 잘못하면 죽든지 병이 나든지 한다.

그리고 볕도 아침 저녁 외에는 아니 쬐어야 한다.

적어도 10년 이상 길러 보고야 그 미립이 난다 하는 건,

첫째 물 줄 줄을 알고, 둘째 거름 줄 줄을 알고, 셋째 위치를 막아 줄 줄을 알아야 한다.

조금만  觸冷해도 감기가 들고 뿌리가 얼면 바로 죽는다.

 

이건 서울 季冬 홍술햇골에서 살 때 일이었다.

휘문 중학교의 교편을 잡고, 讀書 作詩도 하고, 古書도 사들이고, 그 틈으로 난을 길렀던 것이다.

한가롭고 자유로운 맛은 몹시 바쁜 가운데에서 깨닫는 것이다.

원고를 쓰다가 밤을 새우기도 왕왕 하였다.

그러하면 그러할수록 난의 위안이 더 필요하였다.

그 푸른 잎을 보고 芳烈한 향을 맡을 순간에. 문득 환희의 別有世界가 들어 無我無想의 경지에 도달하기도 하였다.  

 

그러다가 조선어 학회 사건에 피검되어 홍원, 함흥서 2년 만에 돌아와 보니, 난은 반수 이상이 죽었다.

그해 여산으로 돌아와서 십여 분을 간신히 살렸다.

갑자기 8.15 해방이 되자 나는 서울로 또 가 있었다.

한겨울을 지내고 와 보니 난은 모두 죽었고, 겨우 뿌리만 성한 것이 두어 개 있었다.

그걸 서울로 가지고 가 또 살려 잎이 돋아나게 하였다. 建蘭과 春蘭이다.

춘란은 중국 춘란이 진기한 것이다.

꽃이나 보려하던 것이, 또 6.25사변으로 피난하였다가 그 다음해 여름에 가 보니, 장독대 옆 풀섶 속에 그 枯骸만 엉성하게

남아 있었다.  

 

그 후 전주로 와 양사제에 있으매, 素空이 건란 한 盆을 주었고, 고경선 군이 제주서 풍란 한 등걸을 가지고 왔다.

풍란에는 雄蘭, 雌蘭 두 가지가 있는데,

자란은 이왕 안서 집에서 보던 그것으로서 잎이 넓죽하고, 웅란은 잎이 좁고 빼어났다.

물을 자주 주고, 겨울에는 특히 옹호하여, 자란은 네 잎이 돋고 웅란은 다복다복하게 길었다.

벌써 네 해가 되었다.  

 

십여 일 전 나는 바닷게를 먹고 중독되어 藿亂이 났다.

5, 6일 동안 미음만 마시고 인삼 몇 뿌리 다려 먹고 나왔으되, 그래도 병석에 누워 더 조리하였다.

책도 보고, 시도 생각해 보았다.

풍란은 곁에 두었다.

하이얀 꽃이 몇 송이 벌렸다.

芳烈 淸爽한 향이 움직이고 있다.

나는 밤에도 자다가 깨었다.

그 향을 맡으며 이렇게 생각을 하여 등불을 켜고 노트에 적었다.

 

잎이 빳빳하고도 오히려 玲瓏하다.

썩은 향나무 껍질에 玉 같은 뿌리를 사려 두고,

淸凉한 물기를 머금고 바람을 사노니.

 

꽃은 하이하고도 여린 紫煙빛이다.

높고 조촐한 그 品이며 그 香을,

숲 속에 숨겨 있어도 아는 이는 아노니,

 

阮堂선생이 翰墨緣이 있다듯이 나는 蘭緣이 있고 蘭福이 있다.

당귀자, 계수나무도 있으나, 이 웅란에는 伯仲할 수 없다.

이 웅란은 난 가운데에도 가장 진귀하다.

 

'看竹向須問主人'이라 하는 시구가 있다.

그도 그럴 듯하다. 나는 어느 집에 가 난을 보면, 그 주인이 어떤 사람인가를 알겠다.

古書도 없고, 蘭도 없이 되잖은 書畵나 붙여 논 방은, 비록 화려 광활하다 하더라도 그건 한 요리집에 불과하다.

斗室蝸屋이라도 고서 몇 권, 난 두어 분, 그리고 그 사이 술이나 한병을 두었다면 三公을 바꾸지 않을 것 아닌가!

빵은 육체나 기를 따름이지만 난은 정신을 기르지 않는가!

 

<원광문화>(1954)

 

 

미립 : 경험을 통해 얻은 묘한 이치, 요령.

觸冷(촉랭) : 찬 기운이 몸에 닿음.

芳烈(방렬) : 향기가 몹시 짙음

枯骸(고해) : 말라 죽은 형체.

紫煙(자연) : 보랏빛 연기, 담배 연기

藿亂(곽란) : 음식에 체하여 토하고 설사하는 급성 위장병의 일종

翰墨緣(한묵연) : 문한과 필묵에 대한 인연

伯仲(백중) : 엇비슷하여 우열을 가리기 힘듦

看竹向須問主人(간죽향수문주인) : 대나무가 자라는 것을 보고 모름지기 그 주인을 묻는다.

               즉 주인의 지조를 알 수 있다는 의미.

斗室蝸屋(두실와옥) : 매우 작은 집을 가리키는 말로, 자신의 집을 겸손하게 이르는 말

삼공 : 삼정승, 곧,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

삼공을 바꾸지 않을 것 : 작가는 고서, 난, 술을 삼공에 비견하고 있다.

                      이 세가지를 갖추고 있으면 삼정승에 비할 바 없이 만족스러운 경지를 느낀다는 표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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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람 이병기는 그의 생활과 작품에서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

가람이 그의 생애에 걸쳐 술과 난초와 책을 얼마나 사랑하였는가는 널리 알려진 사실이다.

술이 그의 호방하고도 거리낌 없는 기절을, 책에 대한 학자로써의 열정을 나타낸 것이라면,

난초에 대한 사랑은 고아한 풍경 속에서 새로운 향기를 찾으려 했던 시조 시인으로써의 노력과 그 뜻을 같이 했다고 여겨진다.
따라서, 난초가 가람의 작품 세계를 해명하는 상징물로서 등장한 것은 결코 범상한 인연이 아니다.

난초 이외에도 매화, 수선화는 가람의 대표적인 소재이다.

이것들은 어렵고 각박한 고난을 극복하고 일어서는 꿋꿋한 생명력을 의미하는 것이니, 가람의 삶과도 일치하는 것이다.

곧 가람 자신의 마음과 표상을 난초의 이미지를 통해 형상화하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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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병기.

호는 가람.

시조 시인 겸 수많은 고전을 발굴하고 주해하는 등 큰 공을 세운 국문학자.

《의유당일기(意幽堂日記)》, 《근조내간집(近朝內簡集)》등을 역주(譯註) 간행했고,

백철(白鐵)과 공저로《국문학전사(國文學全史)》를 발간, 국문학사를 체계적으로 정리 분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