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라리 괴물을 취하리라 / 申采浩
1.
한 사람이 떡장사로 득리하였다면 온 동리에 떡방아 소리가 나고,
동편 집이 술 팔다가 실리(失利)하면, 서편 집의 노구(老?)도 용수를 떼어 들이어
나아갈 때에 같이 와! 하다가 물러날 때에 같이 우르르 하는 사회가 어느 사회냐?
매우 창피하지만 우리 조선의 사회라고 자인할 밖에 없습니다.
삼국 중엽부터 고려 말일까지 염불과 목탁이 세(勢)가 나,
제왕이나 평민을 불문하고 남자는 여자에게 권하며, 할아비는 손자에게 권하여
나무아미타불 한 소리로 8백 년을 보내지 안 하였느냐?
이조 이래로 유교를 존상(尊尙)하매,
서적은 사서오경(四書五經)이나 그렇지 않으면 사서오경을 되풀이한 것뿐이며,
학술은 심·성·리·기의 강론(講論)뿐이 아니었더냐?
이같이 단조(單調)로 진행되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
예수를 믿어야 하겠다 하면,
3두락밖에 못되는 토지를 톡톡 팔아 교당(敎堂)에 바치며,
정치운동을 한다 할 때에는 이발사가 이발관을 뜯어 가지고 덤비나니,
이같이 뇌동부화 하기를 즐기는 사회가 어디 있느냐.
2.
개인도 사회와 같아 갑 종교로 을 종교를 개신(改信)하거나,
갑 주의로 을 주의에 이전할 때에,
반드시 주먹을 발끈 쥐고, 얼굴에 핏대가 오르며,
쌕쌕하는 숨소리에 맥박이 긴급하며,
심리상의 대혁명이 일어나 어제의 성사(聖師)가 오늘의 악마가 되어,
무형(無形)의 칼로 그 목을 끊으며,
어제의 동지가 오늘의 구적(仇敵)이 되어 무성의 총으로 그 전부를 도륙(屠戮)한
연후에야 신생활을 개시함이 인류의 상사(常事)거늘, 근일의 인물들은 그렇지도 않다.
공자를 독신(篤信)하던 자가 이제야 예수를 믿지만,
벌써 30년 전의 예수교인과 같으며,
제왕의 충신으로 자기(自期)하던 자가 처음으로 민주주의를 존봉(尊奉)하지만,
마치 자기의 모복중(母腹中)에서부터 민주의 혼을 배워 가지고 온 것 같으며,
그러다가 돌연히 딴 경우가 되면, 바울이 다시 안연(顔淵)도 될 수 있으며,
단톤이 다시 문천상도 될 수 있으며,
바쿠닌의 제자가 카이제르의 시종(侍從)도 될 수 있으니,
이것이 무슨 사람이냐?
그 중에 아주 도통한 사람은 삽시간에 애국자·비애국자, 종교가·비종교가,
민족주의자·비민족주의자의 육방팔면으로 현신하나니,
어디에 이런 사람이 있느냐.
그 원인을 소구하면, 나는 없고 남만 있는 노예의 근성을 가진 까닭이다.
노예는 주장은 없고 복종만 있어,
갑의 판이 되면 갑에 복종하고, 을의 판이 되면 을에 복종할 뿐이니,
비록 방촌(方寸)의 심리상인들 무슨 혁명할 조건이 있으랴.
3.
손일선의 삼민주의는 민주주의·사회주의 등을 혼동하여,
그리 찬탄할 가치는 있는지 모르겠으나 그래도 주의는 주의다.
우리의 사회에는 수십 년 동안 지사(志士)·위명자(爲名者)가 누구든지 한 개
계시한 소주장도 없었다.
그리하여 일시의 활용에는 썩 편리하였다.
실업(實業)을 경영하는 자를 보면 나의 의견도 실업에 있다 하며,
교육을 실시하려는 자를 보면 나의 주지(主旨)도 교육에 있다 하며,
어깨에 사냥총을 메고 서북간도의 산중으로 닫는 사람을 보면,
나도 네 뒤를 따르겠노라 하며,
허리에 철퇴를 차고 창해역사(滄海力士)를 꿈꾸는 자를 보면,
내가 너의 유일한 동지로다 하고,
외인을 대하는 경우에도 중국인을 대하면 조선은 유교국이라 하며,
미국인을 대하면 조선은 예수교국이라 하며,
자가의 뇌 속에는 군주국·비군주국, 독립국·비독립국, 보호국·비보호국,
무엇이라고 모를, 집을 수 없는, 신국가를 잠설(潛說)하여 시세를 따라 남의 눈치를
보아 값나가는 대로 상품을 삼아 출수(出?)하는 도다.
애재(哀哉)라, 갑신 이후 40여 년 유신계(維新界)의 사내들이 그 중에 시종 철저한
경골한 이 몇몇이냐.
4.
어떤 선사가 명종할 때 제자를 불러 가로되,
“누워 죽은 사람은 있지만, 앉아 죽은 사람도 있느냐?”
“있습니다.”
“앉아 죽은 사람은 있지만,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있습니다.”
“바로 서서 죽은 사람은 있으려니와 거꾸로 서서 죽은 사람도 있느냐?”
“없습니다. 인류가 생긴 지가 몇 만 년인지 모르지만 거꾸로 서서 죽은 사람이 있단
말은 듣지 못하였습니다.”
그 선사가 이에 머리를 땅에 박고 거꾸로 서서 죽으니라.
이는 죽을 때까지도 남이 하는 노릇을 안 하는 괴물이라.
괴물은 괴물이 될지언정 노예는 아니 된다.
하도 뇌동부화(雷同附和)를 좋아하는 사회니 괴물이라도 보았으면 하노라.
관악산 중에 털똥 누는 강감찬의 후신이 괴물이 아니냐?
상투 위에 치포관을 쓰고 중국으로 선교하려고 온 자가 또한 괴물이 아니냐?
이는 군함·대포·부자유·불평등·생활곤란·경제압박 모든 목하(目下)의 현실을 대적
하지 못하여, 도피하여 이상적 무릉도원의 생활을 찾음이니 무슨 괴물이 되리오.
5.
조선인 같이 곤란·고통을 당하는 민족 없음을,
따라서 조선에서 무엇을 하여 보자는 사람같이 가읍할 경우에 있는 이가 없을 것이다.
그러나 경우가 그렇다고 스스로 퇴주(退走)하면,
더욱 자살의 굴에만 가까울 뿐이며,
남의 용서를 바라면 한갖 치소(恥笑)만 살 뿐이니,
경우가 그렇다고 남의 용서를 바랄까.
치소(恥笑)만 살 뿐이니라.
스스로 퇴거할까, 더욱 자살의……(중간 누락)…… 경우가 이러므로
조선에 나서 무엇을 하려 하면 불가불 그 경우에서 얻는 전염병을 예방하는 방법이
있어야 할 것이다.
안순암이 처음 이성호를 보러 가서 목이 말라 물을 청하였다.
그러나 물은 주지 않고 이야기만 한다.
밤이 이슥한 뒤에 성호가,
“이제도 목이 마르냐?” 하거늘,
“사실대로 목마른 증은 다 없어졌습니다.” 한즉,
성호가 가로되,
“참아 가면 천하의 난사가 다 오늘밤의 목과 같으니라.” 하였다.
이 같이 목말라도 참고, 배고파도 참고, 불로 지져도 참고,
바늘로 손·발톱 밑을 쑤셔도 참아, 열화지옥에 만악(萬惡)을 다 참아 가는 이는,
아마 도학(道學) 선생 같은 이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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