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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불교 유신론'/ 한용운

아즈방 2022. 1. 24. 22:50

조선불교 유신론 / 한용운

 

나는 일찌기 우리 불교를 유신 하는 문제의 뜻을 두어 얼마간 가슴속에 성산을 지니고도 있었다.

다만 일이 뜻 같지 않아 당장 세상에서 실천에 옮길 수는 없는 실정이었다.

그래서 시험 삼아 한 무형의 불교를 새 세계를 자질구례한 굴속에 나타냄으로써, 스스로 쓸쓸함을 달래고자 한 것뿐이다.

무릇 매화나무를 바라보면서 갈증을 멈추는 것도 양생의 한 방법이긴 할 것인바,

이 논설은 말할 것도 없이 매화나무의 그림자 정도에 지나지 않는다.

나의 목마름의 '불꽃'이 전신을 이렇게 태우는 바에는,

부득불 이 한 그루 매화나무의 그림자로 만석의 맑은 샘 구실을 시킬 수밖에 없는가 한다.

요즘 불가에서는 가뭄이 매우 심한 터인데, 알지 못하겠다.

우리 승려 동지들도 목마름을 느끼고 있는지.

과연 느끼고 있다면 이 매화나무 그림자로 비쳐 주시기 바란다.

그리고 여섯바라밀다 중 보시가 제일이라고 들었다.

나도 이 매화나무 그림자나마 보시한 공덕으로 지옥쯤은 변하게 될까, 어떨까.

1910년 3월 8일 밤  저자 씀

 

서론

이 세상에 어찌 성공과 실패가 그 자체로서 존재하겠는가. 사람에 의거하여 결정될 뿐이다.

모든 일이 어느 하나도 사람의 노력 여하에 따라 소위 성공도 하고 실패도 하는 것이니,

만약 사물이 자립하는 힘이 없고 사람에 의존할 뿐이라면, 일에 성패가 있는 것도 결국은 사람의 책임일 따름이다.

옛사람이 말했다. '일을 꾀하는 것은 사람에게 있고,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있다'고.

이것을 따져서 말해 보면, 사람에게 성공하기에 족한 노력이 있어도 하늘이 이를 실패로 돌리기도 하고,

사람에게 실패할 만한 노력밖에 없는데도 하늘은 이를 성공시키기도 한다는 뜻이 된다.

아, 이것이 사실이라면 사람으로 하여금 흥이 깨지고 낙담케 함이, 무엇이 이보다 더 하겠는가.

하늘이 이같이 사람이 꾀하는 일의 성패를 좌우한다고 하면,

이는 사람으로 하여금 그 지닌바 자유를 완전히 상실케 하는 결과가 된다.

그리고 나는 삶으로 하여금 그 자유를 완전히 상실케 한다는 것은 들어본 일도 없고 목격한 일도 없는 터이다.

저 소위 '하늘'이란 형태 있는 하늘을 말함인가.

아니면 형태 없는 하늘을 가리킴인가.

만약 형태가 있는 하늘을 말함이라면, 어찌 저 위에 나타나 있어서 스 푸르고 푸른 모습이 우리 눈에 비치는 그것이 아니겠는가.

이미 형태가 있고 보면, 하늘도 현상의 하나인 것이 되고,

그렇다면 자유의 법칙을 따라 다른 것을 침범할 수 없는 점에서 딴 현상들과 조금도 차이가 없다는 것은 단언해도 좋을 것이다.

생명을 지닌 것들이 엄청나게 많아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는 터에,

어찌 모두가 대단치도 않은 한 유형물에 의해 성패를 지배당하는 일이 있겠는가.

만약 하늘을 가리키는 것이라면, 이는 하늘의 도리를 말함이요, 우리가 이르는 하늘은 아닌 것이니,

하늘의 도리란 기실 진리의 뜻이 된다.

그리고 성공할 만한 이치가 있어서 성공하고, 실패할 만한 이치가 있어서 실패하는 것, 이것이 바로 진리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성공은 본래 스스로의 힘으로 성공한 것이며, 실패는 본디 스스로의 힘으로 실패한 것이 된다.

다시 '일을 이루는 것은 하늘에 있다'는 따위를 입에 담을 여지가 있겠는가.

형태가 있는 뜻의 하늘이건 형태가 없는 의미의 하늘이건 그것이 다같이 해당되지 않음이 이와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패가 하늘에 달려 있다고 말하는 사람은, 하늘 있음을 알고 사람 있음을 간과하고 있는 것이라 하겠다.

그런 말을 꺼내기가 무섭게 그 성명이 이미 노예의 명부에 오르고 마는 것이니,

어찌 스스로 저를 사랑하지 않음이 이같이 심한 것이랴.

만약 문명인으로 하여금 이런 말 하는 사람을 오래 된 무덤 속으로부터 끌어내어,

자유를 포기한 죄를 책망케 한다면 변호하고자 해도 변호할 길이 없을 터이다.

진실로 하늘이 일의 성패와 관계없음이 이와 같다면, 만물의 수효가 많다 해도 이런 이치를 파악하면 될 뿐이다.

'일을 꾀함이 나에게 있다'고만 이를 것이 아니라, '일을 이루는 것도 나에게 있다' 고 해야 하리니,

이런 취지를 이해하는 사람은 자기를 책망하되 남을 책망하지 않고,

스스로 자기를 믿되 자기 아닌 다른 것(하늘 따위) 을 믿지 않을 것이다.

세상에서 사리를 논하는 사람들은 이런 도리를 가지고 종지를 삼음이 옳을 것이다.

오늘의 세계는 과거의 세계가 아니며 미래의 세계도 아니오, 어디까지나 현재의 세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어찌하여 천만 년 이전의 일을 연구하는 이가 있고, 천만 년 뒤의 일을 연구하는 이도 있어서,

천지 사이의 형이상·형이하의 문제 치고 연구하여 새로이 하지 않음이 없어서 학술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정치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종교의 유신을 외치는 이가 있고,

그 밖에도 각방면에서 유신을 부르짖는 소리가 천하에 가득하여,

이미 유신을 했거나 지금 유신을 하고 있거나 장차 유신을 하고자 하는 사람들이 헤아릴 수 없도록 접종하고 있는 상태임에도

불구하고 유독 조선의 불교에 있어서는 유신의 소리가 조금도 들리지 않으니,

모르겠구나, 과연 무슨 징조일까.

조선 불교는 유신할 것이 없는 탓일까, 아니면 유신할 만한 것이 못 되는 까닭일까.

곰곰히 생각해 보나 그 이유를 알지 못하겠다.

아, 그러나 이것 역시 알 수 있는 일이다. 어디까지나 책임은 나에게 있을 것임에 틀림없다.

조선 불교의 유신에 뜻을 둔 이가 없지 않으나 지금까지 드러남이 없는 것은 유독 무엇 때문일 것인가.

하나는 천운에 돌리고, 하나는 남을 탓함이 그 원인일 것이 분명하다.

나는 '일을 이룸이 하늘에 있다'는 주장에 의혹을 품게 된 후에 비로소 조선 불교 유신의 책임이 천운이나 남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있는 것임을 알았다.

그리고, 그런 후에 책임을 회피할 수 없음을 갑자기 깨달은 나머지 유신해야 할 까닭을 얼마쯤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그리하여 이 논을 써서 스스로 경계하는 동시에, 이를 승려인 형제들에게 알리는 터이다.

이 논이 문명국 사람의 처지에서 보기에는 실로 무용지물로 비칠 것이다.

그러나 조선 승려의 전도를 생각하는 처지에 선다면 반드시 조금은 채택할 것이 없지도 않으리라 생각된다.

대저 거짓 유신이 있은 후에 참다운 유신이 비로소 나타나는 것이니, 이 논이 후일에 가서 거짓 유신의 구실을 하게 된다면,

필자의 영광이 이보다 더함이 없겠다.

 

불교의 성질

오늘 불교의 유신을 논하고자 하는 사람은 마땅히 먼저 불교의 성질이 어떤지를 살피고,

이것을 현재의 상태와 미래의 상황에서 비추어 검토해야 하며, 그런 다음에야 이 문제를 다룰 수 있다.

왜 그런가.

금후의 세계는 진보를 그치지 않아서 진정한 문명의 이상에 도달하지 않고는 그 걸음을 멈추지 않을 추세에 있으며,

만약 불교가 장래의 문명에 적합치 않을 경우에는 죽음에서 살려 내는 기술을 터득하여 마르틴 루터나 크롬웰 같은 이를

지하에서 불러 일으켜서 불교를 유신코자 한다 해도 반드시 실패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불교가 종교로서 우수한지 어떤지와, 미래 사회에 적합할지 어떨지를 곰곰히 생각하게 되는데.

불교는 인류 문명에 있어서 손색이 있기는커녕 도리어 특출한 점이 있다는 것이 나의 결론이다.

나는 이에 불교의 성질을 두 가지 면에서 말해 보고자 한다.

첫째로 들 것은 종교적인 성질이다.

사람이 종교를 믿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우리들의 가장 큰 희망이 여기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희망은 생존과 진화의 밑천이라고도 할 수 있으리니, 만약 희망을 지니지 않는다면 우리는 아무렇게나 게으르게 살아서,

그날그날을 편히 넘기는 것으로 만족할 것임에 틀림없다.

그렇다면 누가 정신과 육체를 괴롭혀 가면서 일을 하려 하겠는가.

따라서 희망이라는 것이 없으면 사람이건 사람 아닌 것이건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것이 거의 없어질 것이며,

설사 존재한다 해도 황폐·음악에 흘러 전일의 모습은 찾을 길이 없을 터이다.

필시 지옥을 연상시키는 생활과 야만이라고 할 수밖에 없는 행위가 나타나 참담하고 추악하기 끝이 없을 것이며,

그렇게 되면 소위 문명인들은 어느 외진 곳에 도피하여 숨을 죽이고, 생존의 의욕을 상실하고 말 것이다.

그러기에 희망이 행여나 크지 못할까 걱정한 나머지 임시로 욕심낼 만한 달콤한 것을 무형의 세계에 만들어 놓고,

답답한 중생들로 하여금 믿게 하고 희망을 걸게 한 것이 불교를 제외한 여러 종교의 발상의 온상이 되었다.

예수교의 천당, 유태교가 받드는 신, 마호멧교의 영생 따위가 이것이니, 다 깊이 세상을 근심한 데서 나온 것이라고 하겠다.

그러나 어디까지나 속임수의 말로 일관하여 천당이 과연 있는지 없는지,

받드는 신이 정말인지 거짓인지,

영생의 약속이 사실인지 어떤지에 대해 조금도 냉정히 검토함이 없이 아무것도 모르는 채 미신을 지녀 네려오니,

이는 사람을 이끌어 우매의 구렁으로 몰아넣는 것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이 문제에 대해선 민중의 지혜에 부당한 제약을 주는 것이라는 비난이 이미 철학가들 입에서 끊이지 않은 터라,

더 이상 언급할 필요를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구차스러운 말을 꾸며 미신을 변호하는 이도 없지 않다.

그리하여 이렇게 말한다.

'미신인 점은 인정하나, 여러 사람의 정신을 하나로 통일하는 효능을 인정해야 한다.

 2세기 이래 구미 각국에서 전개된 놀라운 업적을 보지 못했는가.

 이것은 반이나마 그 미신이라는 종교의 힘이었던 것이니, 미신이 세계에 끼친 공로가 어찌 크다고 하지 않으랴'

그것은 그렇다.

그러나 정치가로서 역사상에 아주 저명하여 오늘까지 미담의 주인공이 되고 있는 사람 치고,

누구가 무수한 사람의 피를 흘린 끝에 그 공을 자기 한 몸에 거두어들이지 않은 자가 있다는 것인가.

저 정치가들이 만약에 미신으로 민중의 정신을 세뇌하지 않았던들,

생명에 대한 애착을 박탈하여 사지에 몰아넣어 버릴 수는 없는 터이었기에,

백방으로 획책하여 미신으로 사람의 생명을 낚는 미끼를 삼고,

또 사람의 생명으로 적을 쓰러뜨리는 총알을 삼았던 것이니,

예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몇 천만이 한두 개의 미신에 속아 두 번 누릴 수 없는 목숨을 잃었지만,

그 수효를 어찌 헤아릴 수 있겠는가.

사람으로서 미신에 한 가닥의 희망을 걸 수밖에 없다는 것은 비애의 중의 비애임에 틀림없다.

미신은 인류에 공이 있는 듯도 보이지만, 기실 폐해가 너무나 큰 터이다.

불교는 그렇지가 않다.

중생이 미신에서 헤어나지 못할까 두려워하는 까닭에, 경에 '깨달음으로 준칙을 삼는다' 하셨고,

또 중생으로 하여금 부처님의 지혜의 바다에 들어가기 위함'이라 하셨으며,

정각·정변의 주장이 다 그런 취지였으니, 이점에서 부처님이야말로 철저하셨다고 하겠다.

이 세상에 태어나심으로부터 6년에 걸친 고행과 49년의 설법과 열반과 일상 생활에서의 모든 동정과 한 말씀과 한 침묵에

이르기까지 어느 하나가 중생으로 하여금 미혹에서 떠나 깨달음에 이르게 하려는 뜻 아님이 있었겠는가.

그리고 천당·지옥의 주장과 불생불멸의 말이 있기는 있는 터이나, 그 취지인즉 다른 종교와 다르다.

무엇이 다른가. 경에 이르기를 '지옥과 천당이 다 정토가 된다'고 하셨고, 또 '중생의 마음이 보살의 정토'라 하셨다.

이것으로 미루어 생각하면,

불교에서 말하는 천당은 상식으로 생각되는 그런 천당이 아니라 자기 마음 속에 건설되는 천당이며,

지옥도 죽어서 간다는 그런 뜻의 지옥이 아님을 알 수 있다.

대저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세계와 그 속에 있는 삼라만상이 다 중생들의 마음속에 갖추어져 있는 터이므로,

부처님께서 설하신 8만 4천의 법문도 우리의 마음을 떠나 별것이 따로 있음은 아닌 것이니,

자기와는 아무 관계도 없는 천당이니 하는 따위를 받드는 소위 미신과 그 거리가 어떻다 하겠는가.

또 불생 불멸은 다른 종교의 영생 등속과는 다르다.

그것은 참으로 원만한 깨달음의 세계의 주인공이며, 불교를 대표하는 유일무이한 개념이라 할 수 있다.

저 죽은 자를 모두 살려 놓는다는 따위는 암우하기 그지없는 밥통이나 하는 소리다.

세로는 삼세를 포함하되 오래다 하지 않고, 가로는 시방에 걸치되 크게 안 여겨서,

멀리 감각 기관과 그 대상을 초탈하여 고요하면서도 항상 작용하는 것을 진여라 이른다.

이 진여는 결국 불변의 뜻이니, 이것이 어찌 생사와 관련이 있겠는가.

중생이 이런 더없는 보배를 마음속에 간직하고 있으면서도 스스로 미혹하여 알지 못하는 까닭에,

우리 부처님께서 대자대비한 마음으로 이들을 위해 설법하시었다.

다만 중생의 근기가 각기 다르므로 쓰여진 방편이 여러 가지이긴 했으나,

궁극의 목표는 각자가 지닌 진여를 깨닫게 함에 있었던것이다.

이렇게 목적에 도달하면 수단은 잊고 마는 것이매,

이것이야말로 고기를 잡고 통발을 잊음이요, 달을 보고 그것을 가리킨 손가락을 망각함이라 할 만하다.

그러나 통발과 손가락을 미신이라고는 못할 것이니 방편은 방편대로 역시 귀중함이 사실이다.

이에 중생들이 비로소 얼마 안 되는 이 몸으로 수십 년 동안 이 세상에 산다는 것이,

다 허망함을 알아 불생불멸의 경지를 영원한 참된 자아에서 구하게 된다.

이런 희망이 과연 다함이 있겠는가, 없겠는가.

어찌 유독 미신을 지닌 뒤에야 희망을 가질 수 있다고 하겠는가.

불교는 지혜로 믿는 종교요, 미신의 종교가 아님을 알아야 한다.

둘째 불교의 철학적 성질이다.

철학자와 종교가가 왕왕 서로 충돌하여 상대를 용납하지 않는 것은 미신과 진리가 본래 상극인 까닭이다.

종교가들이 한결같이 미신에 얽매여 깨어날 줄 모른다면 철학자들이 반드시 온 힘을 기울여 이에 항거함으로써,

소위 미신적인 종교가로 하여금 지금부터 1세기 안의 천지로부터 종적을 감추게 만들 것이 확실하다.

불교가 어찌 이런 미신적인 종교들과 한 운명을 더듬겠는가.

불경에 '복과 지혜가 아울러 구족했다' 하셨고, 또 '일체 종지'라 하셨다.

일체 종지라 함은 자기 마음을 깨달아 투철하고 막힘이 없어서 모르는 것이 없는 경지에 도달하는 것,

이것이 철학자들의 궁극 목표가 아니겠는가.

다만 철학자들은 포부는 크되 힘이 모자라 허덕이고 있거니와, 우리 부처님에게 있어서야 무슨 어려움이 있으랴.

철학의 대가가 누군지 알고자 하면 석가를 젖혀 놓고 다른 대가가 없을 것이니,

나를 믿지 못하겠다고 말한다면 동서양 철학의 불교와 합치되는 것을 들어 대략 검토해 보겠다.

 

중국인 양계초는 이렇게 말했다.

'불교·기독교의 두 가지가 다 외국에서 발생한 종교로서 중국에 들어왔는데,

 불교가 널리 퍼진 데 대해 기독교가 퍼지지 못한 것은 무슨 때문인가.

 기독교는 오직 미신을 주로 하여 그 철리가 천박해서, 중국 지식층의 욕구를 만족시키지 못한 데대해,

 불교의 교리는 본래 종교면서 철학인 양면을 갖추고 있었으니 그 증도의 이상을 깨닫는 데 있고,

 도에 들어가는 법문은 지혜에 있고, 수도하여 힘을 얻음은 자력에 있으니,

 불교를 예사 종교와 동일시해서는 안 된다.

 불교의 학문이 중국에 들어옴으로부터 그 가르침이 모두 갖추어지기에 이른 그 다음에야 중국 철학이 이채를 띠게 되었다.'

 

이것으로 보면, 중국 철학이 발전하게 된 것은 실로 불교의 덕택임을 알 수 있다.

아, 불교가 조선에 들어온 지도 지금에 1천 5백여 년이 지났다.

만약 사람이 있어서, 1천 5백여 년 동안 이 조선 땅에서 살다가 간 사람들에게

'중국은 저렇거니와, 불교를 들여온 후에 조선 철학은 얼마나 발전했는가.'라고 묻는다면 무어라 할 것인가.

같은 손을 안 트게 하는 약이건만 한 사람은 이를 써서 장수가 되었고,

한 사람은 이것을 사용하면서도 손 빠는 일을 면치 못했으니, 생각컨대 이 약을 어떻게 쓰는가는 사람의 책임이매,

손을 안 트게 하는 약에게야 무엇을 원망하겠는가.

 

독일의 학자 칸트는 말했다.

 '우리의 일생의 행위가 다 도덕적 성질이 겉으로 나타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내 인간성이 자유에 합치하는가 아닌가를 알고자 하면 공연히 겉으로 나타낸 현상만으로 논해서는 안 되며,

 응당 본성의 도덕적 성질에 입각하여 논하지 않으면 안 되는 것이니,

 도덕적 성질에 있어서야 누가 조금이라도 자유롭지 않은 것이 있다고 하겠는가.

 도덕적 성질은 생기는 일도, 없어지는 일도 없어서 공간과 시간에 제한받거나 구속되거나 하지 않는다.

 그것은 과거도 미래도 없고 항상 현재뿐인 것인바,

 사람이 각자 이 공간 시간을 초월한 자유권(본성)에 의지하여 스스로 도덕적 성질을 만들어 내게 마련이다.

 그러기에 나의 진정한 자아를 나의 육안으로 볼 수 없음은 물론이거니와,

 그러나 도덕의 이치로 미루어 생각하면 엄연히 멀리 현상 위에 벗어나 그 밖에 서 있음을 보게 된다.

 그렇다면 이 진정한 자아는 반드시 항상 활발 자유로와서 육체가 언제나 필연의 법칙에 매여 있는 것과는 같지 않음이

 명백하다.

 그러면 소위 활발 자유란 무엇인가.

 내가 착한 사람이 되려 하고 악한 사람이 되려함은 내가 스스로 선택하는 데서 생겨나는 생각이다.

 자유 의지가 선택하고 나면 육체가 그 명령을 따라 착한 사람, 나쁜 사람의 자격을 만들어 내는 것이니,

 이것으로 생각하면 우리 몸에 소위 자유성과 부자유성의 두 가지가 동시에 병존하고 있음이 이론상 명백한 터이다.'

 

양계초는 이 주장을 이렇게 해설했다.

 '부처님 말씀에 소위 진여라는 것이 있는데,

  진여란 곧 칸트의 진정한 자아여서 자유성을 지닌 것이며,

  또 소위 무명이라는 것이 있는데,

 무명이란 칸트의 현상적인 자아에 해당하는 개념이어서 필연의 법칙에 구속되어 자유성이 없는 것을 뜻한다.

 또 부처님의 말씀에,

 "생각컨대 우리가 무시이래로 진여·무명의 두 종자를 지니고 있어서 그것이 성해와 식장 속에 포함되어 서로 훈습하게 마련이다.

 그리하여 범부는 무명으로 진여를 훈습하는 까닭에 반야지를 그르쳐 식을 삼고,

 도를 배우는 자는 또 진여로 무명을 훈습하는 까닭에 식을 전환시켜 반야지를 이룬다."하였다.

 

송대의 유학자는 이 범례를 따라 중국의 철학을 조직한 터이었으므로 주자는 의리의 성과 기질의 성을 나누어서 '대학'을 주하였다.

즉, 그는 말하기를,

"명덕은 사람이 하늘에서 받은 것인바, 허령불매해서 모든 이치를 구비하여 온갖 사물에 응해 작용하는 당체이다.

 다만 기품의 구애와 인욕의 가림으로 인해 때로 어두워지는 수가 있다"고 했다.

 

그러나 부처님은 이 진여가 일체 중생이 보편적으로 지닌 본체요,

각자가 제각기 한 진여를 지니는 것은 아니라 했고,

칸트는 사람이 다 한 진정한 자아를 가지고 있다 했다.

이것이 그 차이점이다.

그러므로 부처님 말씀에 "한 중생이라도 성불하지 않는 자가 있으면, 나도 성불하지 못한다" 하셨으니,

모든 사람의 본체가 동일하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런 태도는 중생을 널리 구제하자는 정신에 있어서 좀더 넓고 깊으며 더없이 밝다고 할 만하다.

이에 대해 칸트는 "만약 선인이 되고자 하는 의욕만 있으면 누구나 선인이 된다."고 했으니,

그 본체가 자유롭다고 믿었기 때문이어서, 수양이라는 면에서 볼 때 좀더 절실하고 행하기 쉬운 특징이 있었다.

이에 비겨 주자의 명실설 같은 것은 만인이 동일한 본체를 지니고 있는 상황을 지적하지 못했는데,

이것이 부처님에게 못 미치는 점이라 하겠고,

또 말하기를 이 명덕이 기품의 구애와 인욕의 가림을 받는다 하여,

자유로운 진정한 자아와 부자연스러운 현상적 자아의 구분에 있어서 한계가 명료치 않았으니,

이것이 칸트에 비겨 미흡한 점이다.

칸트의 본의에 의하면, 진정한 자아는 결코 다른 무엇에 의해 구애되든지 가리어지든지 하는 것이 아니었으며,

구애를 받고 가림을 받는 이상 그것은 자유의 상실을 의미하는 것으로 믿어진다.

양계초가 부처님과 칸트의 다른 점에 언급한 것을 보건대 반드시 모두가 타당하다고는 여겨지지 않는다.

왜 그런가.

부처님은 '천상천하에 오직 나만이 존귀하다' 하셨는데,

이것은 사람마다 각각 한 개의 자유스러운 진정한 자아를 지니고 있음을 밝히신 것이다.

부처님께서는 모든 사람에게 보편적인 진정한 자아와 각자가 개별적으로 지닌 진정한 자아에 대해 미흡함이 없이 언급하셨으나,

다만 칸트의 경우는 개별적인 그것에만 생각이 미쳤고 만인에게 보편적으로 공통되는 진정한 자아에 대해서는 언급을 하지 못하였다.

이것으로 미루어 보면 부처님의 철리가 훨씬 넓음을 알 수 있다.

부처님이 성불했으면서도 중생 탓으로 성불하시지 못한다면 중생이 되어 있으면서 부처님 때문에 중생이 될 수 없음이 명백하다.

왜 그런가. 마음과 부처와 중생이 셋이면서 기실은 하나인데, 누구는 부처가 되거 누구는 중생이 되겠는가.

이는 소위 상즉상리의 관계여서 하나가 곧 만, 만이 곧 하나라고 할 수 있다.

부처라 하고 중생이라 하여 그 사이에 한계를 긋는다는 것은 다만 공중의 꽃이나 제2의 달과도 같아 기실 무의미할 뿐이다.

 

영국의 학자 베이컨이 말했다.

'우리의 정신은 울퉁불퉁한 거울과 같다.

 그리하여 대상이 와서 비치는 경우, 혹은 뾰죽이 나온 곳에 비치기도 하고, 혹은 움푹 팬 데에 비치기도 한다.

 이에 있어서 동일한 대상이라도 비치는 데가 다르기에 주관의 관찰에 잘못이 없을 수 없으니,

 이것이 오류를 범하는 첫째 원인이다.

 또 오관이 감각하는 것은 대상의 본바탕이 아닌 그것의 거짓 모습이니,

 이것이 오류를 범하는 둘째 원인이다.

 그리고 우리의 체질이 각기 다른바, 이것이 오류를 범하는 세째 원인이다,'

 

베이컨의 이 학설은 정력을 기울여 사색하고 실험을 통해 확인하고 난 뒤에 말한 이론이어서,

<능엄경>의 교리와 적잖게 유사한 데가 있다.

그 경에 이르되, '비유컨데, 만약 한 사람이 있어서 깨끗한 눈으로 갠 하늘을 바라보면, 오직 맑은 하늘만이 보일 뿐,

다른 아무것도 눈에 띄지 않는다.

그러나 그 사람이 까닭 없이 눈동자를 움직이지 않고 응시한 끝에 피로해지면, 하늘에 헛것의 꽃이 보이게 된다' 하셨다.

깨끗한 눈과 피로한 눈은 곧 베이컨의 울퉁불퉁한 거울의 뜻이 된다.

이와 같이 뾰죽이 나오고 움푹 들어간 거울인 까닭에 같은 물건도 비치는 것이 달라진다는 베이컨의 이론은,

하늘이 깨끗한 눈에는 하늘로 비치고, 피로한 눈에는 꽃으로 보인다는 경의 말씀과 같다고 할 것이다.

 

또 경에 이르기를 '몸과 감각이 둘이 다 허망하다' 하셨으니,

감각의 대상과 감각하는 여섯 기관이 다 가짜 모습일 뿐 실체가 아닌 까닭에 '둘이 다 허망하다'고 하신 것이었다.

베이컨은 감각의 대상이 되는 객관이 실체가 아님을 알았으나,

감각하는 여섯 기관이 그 대상이 되는 객관이 실체가 아님을 알았으나,

감각하는 여섯 기관이 그 대상과 한가지로 실체가 아님은 몰랐던 것이니,

이는 베이컨이 부처님만 못한 점이다.

 

경에 또 이르기를

'한 물 속에 해 그림자가 비쳤는데 두 사람이 같이 물 속의 해를 보고 나서 각각 동서로 간다고 하면,

 해도 각각 두 사람을 따라 간다.

 그리하여 한해는 동으로 가고 한 해는 서로 가서 햇빛에는 일정한 기준이 없다'고 하셨는데,

베이컨의 제3 원인이란 것도 같은 뜻으로 해석된다.

 

프랑스의 학자 데카르트는 이런 생각을 지니고 있었다.

'만일 각자가 자기 나름의 믿는바 진리가 있을 경우,

 그 진리를 견지하여 일가를 이루게 되고,

 자기 소신과 다른 용납할 수 없는 주장을 하는 자가 있으면 대항하여 공격하게 된다.

 그리하여 주고받으며 서로 토론하면 상당한 시일이 지난 뒤에는 완전한 진리가 결국 그 사이에서 생겨날 것이다.

 왜 그런가.

 지혜에 고하·대소의 차이가 있기는 하지만 그 본성은 동일하며, 진리의 성질이 또 순수하여 잡박함이 없는 까닭이다.

 동일한 본성의 지혜로 순수하여 잡박함이 없는 진리를 구함에 있어서 힘써 이 일에 종사하는 경우,

 어찌 방법은 달라도 한 결론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그러므로 처음에는 사람마다 이론이 다르다 해도 반드시 서로 웃으며 손을 잡는 날이 있을 것이다.'

 

데카르트의 이런 이론은 <원각경>의 내용과 완전 부합된다,

데카르트가 각기 믿는 바 진리 운운한 것은 경에서 '견해가 장애 노릇을 한다' 한 것과 같고,

서로 대항 공격한다 한 것은 경에서 '여러 환을 일으켜 환을 제거한다' 한 것에 해당하고,

완전한 진리 운운한 것은 경에서 '궁극의 진리를 얻는다' 한 것과 일치하고,

본성은 동일하다 운운한 것은 경에서 '중생과 국토가 동일한 법성이다' 한 것과 합치하고,

방법은 다르나 같은 결론에 도달한다 한 것은 '지혜와 어리석음이 통틀어 반야가 된다.'고 한 것과 같은 취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