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미는 마을의 동쪽에서 서쪽으로,
터웃개(위미3리), 곤냇골개(위미2리), 동앞개(위미2리), 서앞개(위미1리), 밍금개(위미1리)까지
5개의 포구를 거느리고 있는 마을이다.
이중 터웃개나 밍금개는 규모가 작고, 풍랑에 직접 노출되기 때문에 과거에는 테우를 접안시키는
용도로 사용했다.
과거로부터 수심이나 풍랑으로부터의 안전성 등을 감안할 때,
어선과 병선을 정박시킬만한 포구는 동앞개와 서앞개였다.
청음 김상헌이 < 남사록 > 에서 "정의현에 병선을 정박시킬만한 포구가 13개 처" 중 한 개소로 지목한
우미포(又尾浦)는 동앞개와 서앞개를 포함한 앞개를 말했던 것으로 보인다.
앞개라는 이름은 마을 앞에 있는 포구라 하여 붙여진 것인데, 포구가 넓고 수심이 깊다.
게다가 동쪽에는 조배머들코지가,
서쪽에는 신우지코지가 남으로 길게 돌출하여 천연 방파제 역할을 한다.
두개의 곶이 파도와 바람으로부터 포구를 보호해주는 천혜의 환경으로 인해,
일제시대에는 제주와 일본 오사카를 연결하는 정기여객선 기미가요마루(1천 톤급), 게이조우마루
(8백 톤급) 등이 위미포구에 기항했다.
최근에는 앞개에 동서 방파제가 크게 건설되어 '위미항'이라고 부른다.
동방파제로 가는 입구에는 과거 인공 방파제가 건설되기 이전에 동방파제 역할을 감당했던 조배머들
코지가 있다.
조배머들코지는 구실잣밤나무(제주사람들은 이를 조배낭으로 부른다)가 자생하는 풀숲이다.
과거에는 맑은 바닷물을 배경으로 한 정겨운 푸른 숲으로 인해, 선남선녀에게는 산책로로,
이 일대 아이들에게는 놀이터로 각광을 받았다.
이 조배머들코지는 오랜 기간 '벌러니코지'로 불러지다가 10여 년 전에서야 옛 지명을 회복하게 되었다.
이와 관련하여 주민들이 간직해온 가슴 아픈 사연이 있다.
위미마을이 고향인 시인 고정국씨의 기록이다.
원래 이곳에는 70척이 넘는 기암괴석들이 비룡형으로 앉아,
바다의 여의주를 바라보는 형상처럼 보였는가 하면,
책을 받아 앉아 공부하는 사람의 상과 비슷하다하여 문필봉형(文筆峰形)이라고 말하는 바위들이 있었다.
그래서 설촌 이래 마을 사람들의 신앙적 성소가 돼 왔다.
그러던 중 100년 전 쯤 일제치하 당시 일본인 풍수학자가 이 거석을 보고 한라산의 정기가 이곳에
모아졌다면서 앞으로 위미리에 위대한 인물이 대를 이을 것이라고 예언하였다.
이 일본인은 당시 위미1리에 거주하는 유력한 김씨집을 찾아가,
"저 기암거석이 당신의 집을 향해 총을 겨누고 있는 상이니,
당신네 가문이 번창하려면 조배머들코지의 거석을 파괴해야한다"고 꼬드겼다.
결국 일본인의 속임수에 넘어간 김씨는 이곳의 괴석들을 폭파시키고 말았는데,
폭파당시 거석 밑에는 바로 용이 되어 승천하려던 늙은 이무기가 피를 토하며 죽어있었다고 한다.
그 후 사람들은 석벽이 벌러졌다(제주어로 '깨졌다'는 의미)고 하여 '벌러니코지'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일이 화근이 되었는지, 그 뒤 위미리에는 큰 인물이 나오지 않았고,
장래가 촉망되는 인물이 나왔다가도 시름시름 좌절하거나 단명하였다고 전해지고 있다.
-고정국의 < 조배머들코지 이야기(감귤과 농업정보 2000년 2월호) > 중 일부.
그 이후, '위미에서 큰 인물이 나오지 않는다'는 말이 주민들 사이에 거의 정설처럼 받아들여지고
있었다.
그러다가 1997년에 위미개발협의회가 조배머들코지를 복원을 계획하고,
당시 남제주군의 지원을 이끌어냈다.
그리고 주민들이 합심하여 100년 전쯤 깨어진 후 그대로 부근에 남아있었던 바위들을 추슬러
조배머들코지를 복원하기에 이르렀다.
1998년에는 이곳에 복원된 조배머들코지를 기념하기 위한 비석이 세워졌는데,
비문은 이렇게 끝을 맺는다.
'주변에 산재하던 석편들을 정성스레 추슬러 비로소 지난날의 조배머들코지를 복원하게 되었으니,
이는 고향의 발전과 리민들의 안녕, 그리고 후손들의 번영을 바라는 간절한 기원의 발로에 다름 아니다.
이에 우리 세대의 충정을 후세에 전하기 위하여 이 비를 세운다.
이곳을 찾은 모든 사람들이여! 그 이름에 조배머들코지의 영광이 있으라.'
옛것을 복원하기 위한 주민들의 간절한 노력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남는 아쉬움이 있다.
방파제와 접안시설 등을 만드는 과정에서 조배머들코지의 주변이 모두 매립되는 바람에,
푸른 바닷물이 더 이상 이곳을 드나들 수 없다는 것이다.
코지(곶)가 매립된 육지 위에 얹혀져 있는 형상이니, 마치 장화를 신은 위에 고운 한복을 두른 격이다.
조배머들코지 복원이 여전히 미완의 과제로 남아있다는 생각이다.
[오마이뉴스 장태욱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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