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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音 樂/├ 交響曲 .

'Symphonic Fantasia Korea'(한국 환상곡)

아즈방 2022. 2. 15. 08:40

Symphonic Fantagia KOREA

(한국 환상곡)

 

conductor 안 익 태

 

Los Angeles Philharmonic Orchestra

 

 

제 1 부 : 개국과 평화로운 우리 조국

제 2 부 : 일제의 압박과 백성들의 암울함

제 3 부 : 조국의 광복

제 4 부 : 한국전쟁과 조국의 영광

 

 

작사자 미상의 우리나라 국가인 애국가의 가사는 윤치호, 안창호, 민영환 등이 만들었다는 설이 있으나,

어느 것도 공인되지 않았고, 이 곡은 1936년에 만들어져 1948년 8윌 15일 정부수립과 함께 대한민국 국가로

불리게 되었다.

정부에 의하여 정식으로 국가로 제정되거나 채택된 것이 아니라,

관습적으로 국가로 불리다가 명실공히 대한민국을 상징하는 노래가 되었다.

 

작곡자가 애국가의 가사를 처음 접한 것은 1919년 3.1운동 때였고,

그 뒤 애국가가 스코틀랜드 민요 'Auld lang syne'(이별의 노래)의 곡조에 붙여 불리는 것을 안타깝게 생각하여

한국사람인 자신이 직접 작곡해야겠다고 결심하고 1936년에 곡을 완성하였다.

그리고 같은 해 독일 베를린 올림픽에 참가한 한국선수단을 찾아가 그들과 함께 불렀는데, 우리나라의 애국가가

불린 것이 이때가 처음이었다.

 

한국환상곡(Symphonic Fantasia Korea)은 우리 민족의 영광과 수난을 함께묘사한 대서사시로 크게 네부분으로

나뉘어진다.

첫번째는 한국의 전통음악을 토대로 한 서정적인 부분으로,

서두에 천지를 진동하는 듯한 전 관현악의 울림으로 장엄한 고조선의 개국을 알리고,

이어서 아름다운 조국 강산을 묘사하는 서정적인 멜로디가 흐르고 거기에 우리의 민요가락이 여러가지 악기소리로

나타나 평화를 사랑하는 순박한 한민족의 심성을 묘사한다.

때때로 타령조의 멜로디가 섞이면서 농민들의 춤사위를 표현하기도 한다.

 

두번째는 일제의 압제하에서 신음하는 조국의 암울한 모습을 묘사한 부분으로,

이토록 평화롭던 고요한 아침의 나라 한국을 이 강산을 침노한 일제에게 짓밟혀, 곡상은 무겁고 침통하게 흐르고

만다.

평화롭던 민족의 가락은 끊어지고 일제에 항거하는 투쟁은 계속되나 수많은 애국지사들의 죽음으로 진혼의 슬픔이

계속된다.

 

세번째는 드디어 광복의 기쁨을 맞는 애국가의 합창부분으로,

이 부분에서 안익태선생은 자신이 작곡한 애국가를 1절부터 4절까지합창으로 표현하고 있는데 애국가가 조를 달리하며

소리 높이 울려 퍼질때 그감격은 말할 수 없는 감격으로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마지막으로 네번째는 6.25 동란으로 인한 처절한 동족간의 싸움을 묘사한 부분으로 한반도는 6.25 동란으로

인한 전화에 휩싸이게 되고 선율은 또다시 슬픔으로 바뀐다.

전통 아악의 정취가 울려 퍼진 뒤에 "무궁화 삼천리 나의 사랑아, 영광의 태극기 길이 빛나리. 금수강산 화려한

나의 사랑아"하고 외치면서 만세 소리와 함께 한국환상곡은 대단원의 막을 내린다.

 

 

한국환상곡은 안익태 선생이 미국에서 공부하면서 착상하기 시작했고 필라델피아 음악학교를 졸업할 때인

1932년에 1부가 완성되었지만 연주되지 못했고, 독일로 건너가(1936년) 애국가를 작곡한 후 후반부에 애국가를

합창으로 삽입하여 에이레의 더블린에서 비로소 초연(1938년) 되었다.

한국환상곡에는 선생의 스승인 리하르트 쉬트라우스의 조언이 많이 포함되어있고,

해방까지는 합창부분까지만 연주되어 오다가 6.25 동란이후 제4부(전쟁부분)를 추가시켜 현재의 곡으로 완성

시킨 것이다.

1938년 "더블린"에서 초연한 이래 선생은 1939년 로마교향악단 연주에서 역시 한국환상곡을 공연했고,

같은해에 베오그라드 라디오 교향악단, 불가리아 필하모니에서도 연주했는가 하면,

1940년에는 부다페스트 필하모니, 1941년에는 쥬리히와 하노버, 1942년에는 베를린 필하모니와 바르셀로나,

마드리드 필하모니, 1943년에는 다시 베를린 필하모니와 마드리드 심포니, 다시 1944년에는 로마와 파리등에서

총 15회에 걸쳐 한국환상곡을 무대에 올린바 있다.

선생은 해방된 조국에 자신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세계적인 음악가들을 초빙, 음악을 활성화 시키고 바람직한

오케스트라 운동을 통해 음악의 생활화를 국민속에 심으려고 했다.

그런데 무엇보다도 안타까운 일은 세계적인 지휘자로서 활약하던 안익태 선생이 조국의 오케스트라를 위해 일하지

못하고 가신 점이다.

 

그는 비록 조국을 떠나있었어도 자신이 지휘봉을 들 때마다 한국환상곡을 연주,

이 지구 상에 분명히 한국이 있음을 밝혔고 어느곳에서나 우리의 말로 애국가를 소리 높여 외치도록 하였다.

 

그가 이탈리아를 방문 당시 독재자 무솔리니 치하에서 "한국환상곡"을 연주하려고 하자 일본 정부는 압력을 가해

안선생을 추방하도록 했는가 하면, 그가 가는곳 마다 일제의 마수는 끈질기게 따라 다니며 그를 못살게 굴었다.

생전에 그가 그렇게도 염원하던 조국에서의 생활을 끝내 이루지 못한 채 이역의 하늘 아래서 눈을 감긴 했어도

그의 예술적 유산들은 지금도 우리곁에 남아 우리와 함께 호흡하고 있다.

한 많은 조국의 역사와 우리 민족의 슬기로운 얼, 그리고 정의와 자유를 위해 끊임없이 투쟁하는 한민족의 힘찬

의지를 담아 작곡한 "한국환상곡"은 조국에 바치는 사랑과 충성의 표증이며, 스페인에 살면서도 끝까지 한국

국적을 고수한 선생의 투철한 한국 국민으로서의 신념은 우리민족 모두에게 귀감이 아닐 수없다. 

 

  安 益 泰 (1905-1962)

안익태는 1905년 12월 5일 평양에서 태어났다.

당시 중류층 가정의 셋째아들이었던 안익태는 형 익심이 선물한 바이올린을 받으면서 인생의 행로를 결정한 것으로

알려졌다.

1919년 독립 운동에 연루되어 반강제로 일본으로 유학을 떠난 뒤,

1932년에는 미국으로, 1936년에는 유럽으로 건너가 작곡가 겸 지휘자로서의 길을 걷게 된다. 

1946년 스페인 백작의 딸 로리타 탈라베라와 결혼하였고 그해 마요르카 심포니 오케스트라를 창단,

상임 지휘자로 취임했다.

그가 오랜 방랑 생활 끝에 고국 땅을 밟은 것은 1955년 이승만 대통령 탄생 80주년 기념 음악제에 초청을 받았을 때였다.

그후 고국에서 음악을 계속하려 했던 안익태는 꿈을 이루지 못하고 1965년 바르셀로나에서 각기병과 간경화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유해는 평소 그의 소망대로 1977년 7월 국립묘지로 옮겨 안장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