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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歲月은 지금/4 월 .

에세이 - '연둣빛 꽃, 찻잎 따다' / 이해숙

아즈방 2025. 4. 19. 11:00

 

연둣빛 꽃, 찻잎 따다 / 이해숙

 

4월 산색이 화사하다.

눈록(嫩綠) 나뭇잎과 연분홍 산벚꽃이 한 폭 풍경화를 선사한다.

산길을 오르며 만난 매화나무꽃 진자리에는 콩알만 한 매실이 조롱조롱 매달렸다.

곡우(穀雨)에 내리는 비는 오곡백과를 살찌우고,

찔레꽃 필 적에 내리는 봄비는 풍년을 약속한단다.

지난 몇 해 이맘때엔 봄 가뭄으로 들녘이 강말랐었는데 올해는 잦은 비로 들 풍경이

윤택하다.

흰 봄꽃들 향연에 이어 산천물색이 연둣빛 세상이다.

 

곡우(穀雨) 전후에 딴 찻잎으로 ‘우전차’를 만든다.

편백숲에 차나무가 늘비하다.

키를 넘는 야생차나무 위로 간간이 볕뉘가 쏟아진다.

숲 그늘에 직선의 햇살이 하늘로 통하는 사다리 같다.

편백 이슬을 먹고 자란 때문인지 야생차나무들이 생기롭다.

하지(夏至) 지나 잎이 왕성할 때는 찻잎이 내뿜는 향기로 주변이 진동하지만,

아직은 어린잎이라 성기고 비리다.

이따금 새들의 향연이 풍경 소리 되어 적요한 공간을 흔든다.

 

햇살과 청량한 공기가 신령스럽다.

잎눈 트고 나온 보드라운 차 움이 차마 여려서 아프다.

꽃보다 더 아름다운 연둣빛 꽃. 창끝보다 강한 예쁜 꽃.

산비탈을 오르내리다 보니 서너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차 따는 일에 남편이 동행해준다.

이제 숲은 온통 우리 차지다.

새들 노랫소리를 추임새 삼으니 차 따는 일이 한결 신명났다.

 

몇 년 전 찻일을 배우려고 이름 있는 교육장을 찾았었다.

다도(茶道)는 생활예절 교육으로 시작되었다.

편히 즐기고 수월하게 차를 대하면 좋을 것을,

지극한 예를 갖춰야 하는 것이 여간 번거롭지가 않았다.

 

나는 책을 통해 차에 관심을 두게 되었다.

인도의 요가 수행자들도, 옛 성현이나 고승, 대학자들도,

학문을 익히고 수행을 하며 늘 차를 가까이했다.

그 세계가 고상하게 느껴졌다.

지극한 학문의 경지는 요원하지만, 그들이 즐기는 차 생활은 좇고 싶었다.

생활이 도에 이르려면 평생의 시간이 필요하리라.

그러나 시절에 맞춰 차를 따고 덖고 갈무리하는 공부를 흉내내다 보면,

조금씩 나아감이 있을 것도 같다.

 

곡식 낱알 같이 돋은 움을 한 깃이나 두 움 정도 따니 몇 시간을 공들여도 미미한

분량이다.

숨죽은 찻잎을 펼치니 신선한 풀향이 물씬하게 풍긴다.

코를 갖다 대고 흠흠 들이켰다.

오염 없는 진향을 온몸으로 마셨다.

씻어 대소쿠리에 담아 물기를 터니 윤기가 자르르하다.

 

제대로 된 다구(茶具)는 없지만,

선인들의 따고 덖고 갈무리하는 그 모든 찻일을 따라서 해본다.

참맛을 감별하는 일이나, 온축된 향과 색을 온전히 피워내는 일은 지난한 예술의

영역이다.

순박하게 익히고 즐기다 보면 어느덧 나의 차 생활에도 선망하던 다인(茶人)의

향취가 미미하게 전이되리라.

 

지난날을 돌아보니 세상 모든 일이 녹록하지 않았다.

힘들 때마다 포기하지 않고 묵묵히 버텨내었더니 행운도 따라줬다.

피어난 여린 꽃이 한없이 경이롭다.

잎눈 속에 웅크려 비바람을 견뎌냈기에 고귀하다.

분분한 봄날, 아프게 길어 올린 생명을 응시하며 깨닫는다.

삶 속에는 더 정진해야 할 이유가 충분하다고.

 

2021년 0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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