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은 아쉽다.
더구나 그것이 우리의 일상과 밀접했던 것이라면 그 아쉬움은 더 커진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다방이 사라지고 있다.
시내를 걷다가 어쩌다 다방이란 간판을 보면 스러져가는 폐가의 택호를 보는 듯 애잔하다.
그래도 가슴을 따스하게 하는 정겨움이 있어 다시 한번 쳐다보게 된다.
내가 다방을 처음 들어가 본 기억은 고등학생 때인 것 같다.
어떤 행사가 있어 친구들이 모였는데 시간이 많이 남았다.
그래서 몇몇이 어울려 주위를 한 바퀴 돌기로 했다.
조금 걸으려니 다방이 보였다.
그런데 다방에서 시화전을 한다고 한다.
다방이 어떤 곳인지 궁금해하던 차에 떳떳하게 들어가 볼 수 있는 구실이 생긴 것이다.
오전이라 그런지 손님은 없었고 예쁘고 세련된 아가씨가 혼자 있었다.
우리는 시화전보다 예쁜 누나 같은 아가씨에게 넋이 빠져 그녀의 얼굴만 희끗거리며 쳐다보느라,
시화전은 보는 둥 마는 둥 하다가 다방을 나왔다.
그 후로 다방엔 예쁜 아가씨가 있는 곳으로 알고 있었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후에는 수시로 드나들었는데, 친구들과 모임을 거의 다방에서 했기 때문이다.
시내 다방은 넓어서 이십여 명이 모이는 동문 모임도 가능했다.
또 시내의 유명 다방은 젊은이들의 아지트 역할도 했는데,
다방에 앉아 담배를 뻐금거리며 빈둥거리고 있으면 친구 중에 누구라도 나타나고는 했다.
다방에 들어서면 늘 담배 연기가 자욱했다.
대개의 손님은 자리에 앉으면 으레 습관처럼 담배를 입에 물었는데 그건 당연한 행위였다.
탁자에는 큰 곽 성냥 통과 재떨이가 놓여 있었다.
성냥 통의 성냥은 대개 부러져있었는데,
하릴없이 성냥개비를 똑똑 부러뜨리는 것을 즐기는 친구들의 짓 때문이었다.
번화가의 다방이 상업적인 데 반해 변두리의 다방에는 낭만이 있었다.
다방에 들어서면 한복 곱게 입은 마담이 우아한 자태를 뽐내며 인사를 한다.
하지만 마담에게 정중한 인사를 받는 사람은 마담이나 레지에게 차를 사주는데 인색하지 않은,
넉넉한 마음을 가진 사람이어야 한다.
그때 우리는 젊은 나이였기에 마담이나 레지에게 차를 사주거나 그럴 형편은 아니었다.
그래도 다른 손님이 없을 때는 짙은 농담을 주고받으며 시시덕거리기도 했다.
다방에서 마담과 즐기는 사람은 아무래도 머리가 희끗희끗한 중년이나 초로의 손님 정도는 되어야 한다.
그들도 대접을 받으려면 손님이 뜸한 시간대를 맞추어야 한다.
그래야 마담이나 레지가 마음 놓고 옆자리에 앉을 수 있으니까.
단골손님이 들어오면 마담과 레지가 동시에 달려가 인사를 한다.
이들이 인사하는 태도를 보면 단골인지 처음 오는 손님인지 구별이 된다.
처음 오는 손님에게도 무심하지는 않다.
그가 돈 잘 쓰는 단골손님이 될 줄 어찌 알겠나.
처음 보는 손님이더라도 레지들은 예의를 차린다.
처음부터 차를 마시라고 권하는 것은 손님을 기분 나쁘게 할 수도 있다.
남자가 ‘차 한 잔 가져오지!’ 할 때까지 기다린다.
말이 떨어지기가 무섭게 옆에 착 달라붙어 있던 레지가 ‘저도 한잔 사주세요.’ 하며 아양을 떤다.
어찌 거절하랴, 마담 언니 것까지 차는 석 잔이 나온다.
손님은 커피를 마시고 마담과 레지는 비싼 쌍화차를 마신다.
우리는 대폿집에서 막걸리를 마시고는 다방에 들러 차를 마실 때가 가끔 있었다.
어떤 때는 있는 폼, 없는 폼 다잡으며 도라지 위스키를 주문한다.
그것도 차라고 이름 붙여 ‘깡티’라고도 했고 ‘위티’라고도 했다.
그것은 순 객기의 발동이었다.
뱃속에 탁한 막걸리가 들어있는데 거기다 비싼 도라지 위스키를 붓는 것이다.
이렇게 한 잔씩 마시면 찻값은 술 한 병값이 넘어간다.
어떤 넋 빠진 녀석은 술에 취해 들어와서는 레지를 옆에 앉힌다.
그리고 위스키를 레지 몫까지 두 잔을 시킨다.
그렇게 몇 번을 반복한다.
레지를 술에 취하게 해 어찌 한번 해보려는 얕은 속을 모르는 사람이 있으랴.
주방에서는 레지의 잔에는 색깔 비슷한 엽차를 채워서 내보낸다.
끝내 술 취한 손님은 혼자만 더 취해 패잔병 모양 돌아선다.
시내에는 음악다방이 있었다.
뮤직 박스에는 DJ가 있고 그곳에서 신청한 곡을 받아 LP판을 틀어주었다.
DJ는 대학생들이 아르바이트로 많이 했다.
어떤 이들은 여학생들한테 연예인 같은 인기를 누리기도 했다.
나도 DJ를 하루 해본 적이 있는데 직장 신입사원 때 일이다.
내가 가입한 작은 모임에서 불우이웃 돕기 일일 다방을 했다.
티켓의 주 판매처는 회사의 동료직원들이고, 일부 외부의 가까운 친구들에게도 판매했다.
마침 다방에 뮤직 박스가 있어 프로가 아닌 아마추어 DJ가 내 담당업무였다.
신청한 곡을 받아 음악을 틀어주는 역할이 주였지만 찾아오는 직원들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는 것도
빼먹을 수 없는 역할의 하나였다.
다방은 맞선을 보는 곳이기도 했다.
소개해주는 사람이 서로 인사를 시켜주고 자리를 비켜주면 둘이 남아 이야기를 나눈다.
밖으로 나가 서로 좀 더 알아보는 시간을 갖기도 하고 그냥 그 자리에서 헤어지기도 한다.
나도 몇 번 다방에서 맞선을 본 적이 있다.
동양의 차 문화는 오랜 전통을 가졌다.
한국의 차 문화는 중국이나 일본만큼 발달하지는 못했으나,
이미 통일신라 시대에 다연원(茶淵院)이 있었고,
고려 시대에는 다방(茶房)이 있었다.
지금처럼 커피가 주류가 되는 상업적 다방은 한 말의 개화기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한때는 큰 건물이 생기면 어김없이 다방이 들어서 다방의 전성시대가 있었다.
큰 도시에서 다방이 서서히 자취를 감출 때, 지방 도시나 농촌에 티켓다방으로 변질 돼 매춘행위를 하여
사회의 지탄을 받기도 했다.
요즈음 카페나 커피 전문점이 생기면서 다방이란 명칭은 급격히 쇠락하고 있다.
이제 모든 다방이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지며 낭만의 아쉬움을 남긴다.
나도 지금의 나이에 이르면 동네의 조그만 단골 다방에 들러 마담을 옆에 앉혀놓고 쌍화차를 마시며,
젊은 시절을 이야기하며 낭만적인 시간을 보내려 했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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