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행잎 / 김동리
노란 은행잎이, 뜰에 하나 수북이 깔렸다.
여기저기 한두 잎씩 떨어져 있는 것이 아니라, 뜰에 하나 가득,
그것도 발이 푹푹 묻히도록 쌓여져 있는 것이다.
이 집에는 은행나무가 여섯 그루나 둘려 서 있다.
아름드리는 못되지만 3, 40년씩 된 꽤 큰 나무들이다.
우리가 이사를 오기 전부터 본디 네 나무나 있는 것을, 게다가 다시 두 나무를 더 들였던 것이다.
이만하면 내가 얼마나 은행나무를 좋아하는지 짐작될까.
은행나무의 특징은 잎새다.
그 숱 많고 두껍고 짙푸른 잎새는 여름내 우리의 마음에 샘물을 퍼부어줄 뿐 아니라,
불나방 따위 지저분한 벌레가 덤비지 못하므로 그 드리워진 그늘도 언제나 깨끗하다.
특히 가을의 그 샛노랗게 물든 맑고 깨끗한 빛깔이란,
대체로 구질구질한 편인 우리 인간에겐 너무 과분(過分)한 귀물(貴物)같기만 하다.
열매도 속기(俗氣)는 전혀 없다.
사과나 배나 감이나 복숭아들처럼 굵기를 자랑하거나,
붉고 누른 빛깔로 우리의 눈을 유혹하거나,
달고 신 맛으로 우리의 혀를 자극한다거나,
붉고 그런 것이 아니고,
빛깔도 은은한 담록색인데다 맛도 또한 그렇게 조금 향긋하고 쌉쌀할 따름이다.
이런 것을 소위 선미(仙味)라고나 할까.
가을이 늦으면 잎이 싹 내리고 가지 끝끝이 완전한 나목(裸木)이 되어버리는 것도 개결해서 좋다.
그러나 은행나무는 역시 잎이다.
특히 가을철의 노랗게 물든 잎새―무슨 꽃이 이에서 더욱 꽃다우랴.
나는 뜰에 하나 가득 덮인 은행잎을 바라보며 이것이 모두 황금이라면 하고 생각해 본다.
황금은 속된가.
그렇다.
그것은 속세영화(俗世榮華)의 상징일지도 모른다.
가만 있자.
그렇다면 말이 좀 이상하게 돌아가는 것 같다.
나는 조금 전에 그 노란 빛깔의 은행잎을 두고 우리 인간에겐 과분한 귀물 같다고도 했고, 그 열매의 향긋하고 쌉쌀한 맛을 선미하고나 할까라고도 했는데, 그같은 은행잎이 노란 빛깔에서 갑자기 속세영화의 상징일지도 모르는 황금을 연상한다니, 이 무슨 모순도 심한 말이다 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나는 왜 같은 대상을 두고,
같은 내가 상반(相反)된 생각을 일으킬까.
그것은 과연 상반된 생각일까.
황금이란 무엇인가.
황금이란 속된가.
나는 위에서 이미 황금은 속된가, 하는 물음에 그렇다고 대답했다.
뿐만 아니라 그것이야말로 속세영화의 상징일지도 모른다고도 덧붙였다.
그것은, 부귀영화의 주인공인 모든 군왕(君王)의 주변이 언제나 황금인 것을 보아도 쉽게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가장 오랜 옛날부터,
가장 보편적인 보물이 황금인 것도 사실이요.
모든 재산을 평가하는 기준으로서의 돈의 실질적인 내용도 황금인 것이다.
부귀영화가 이미 속세의 것일진대,
부귀영화의 상징이라 할 수 있는 황금 역시 속된 것이라고 보는 것은 누구나 일단 수긍할 수밖에 없는 일이다.
그러나 모든 말은 우리의 생활과 역사와 함께 그 내용이 곧장 확충되며 변모된다.
황금도 처음엔 누런 빛깔의 쇠붙이에 지나지 않던 것이 차츰 패물(佩物)이 되고,
왕관(王冠)이 되고, 술잔이 되고, 촛대가 되고, 팔찌가 되고, 돈이 되고, 재산이 되고,
부귀가 되고, 영화가 되고, 이렇게 생활과 역사 속에서 그 개념이 줄곧 변모되며
확충되어 왔던 것이다.
전란 속에 유랑하던 그 당대(唐代)의 시성(詩聖) 두보가,
烽化連三月 家書値千金
-봉화는 석 달을 연이어 오르는데, 집소식은 천금만큼이나 귀하구나' 라고,
읊었을 때의 이'천냥어치 황금'이란 이백의 백발삼천장(白髮三千丈)과 같은
민요조(民謠調) 내지 속담조(俗談調)의 숙어로 보겠지만,
여기서 이미 황금은 속된 것의 대표이기보다 그냥 아쉽고 귀한 것의 대명사로 변모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이 소식의 '봄저녘 한 시각은 천냥어치 황금이다(春宵一刻値天金)'로 옮기면 또 다시 변모를 한다.
여기서의 황금은 그냥 아쉽고 귀한 것의 대명사에 그치지 않고,
달과 꽃의 봄밤을 끝없이 아끼고 사랑하는 심정으로 가리키는 것으로,
속기(俗氣)에 도전하는 풍류와 멋을 곁들이고 있는 것이다.
따라서 황금은 속된 것에서 귀한 것으로,
귀한 것에서 다시 고귀하고도 풍류적인 것으로 곧장 발전한 셈이다.
그러나 황금의 가장 높은 경지는 왕실에서 발견한다.
왕유는 시불도(詩佛道), 즉 불교의 진리를 의미하는 것이다.
머리는 백발인데 아직 성도(成道)는 못했다는 뜻이다.
여기서 황금은 부귀영화의 상징이고 고귀하고 풍류적인 것의 대명사로,
또다시 '도'의 상징으로까지 나아간 것이다.
어찌 속된 것의 대표라고만 하겠는가.
시성 두보는 애닯은 향수의 정을 황금에 부쳐 해아렸고,
문장 소식은 안타까운 봄밤을 황금에 견주어 아꼈고,
시불(詩佛) 왕유는 드디어 도를 황금의 이름으로 불렀다.
누가 감히 군왕(군왕)의 머리 위에 번쩍이는 누런 쇠붙이나,
점포(店鋪) 가진 여주인의 손가락에 끼워진 조그만 쌍고리 따위만을 황금이라
하겠는가. 이미 황금이 이러할진대,
내가 은행나무를 두고 선미(仙味)와 황금을 함께 생각한들 또한 모순이라 하겠는가.
나는 지금 뜰에 하나 가득한 황금 속에 발을 묻고 서서,
소슬한 가을과 마음속에 오가는 고금(古今) 나의 저물어 가는 인생을 생각하고 있다.
눈앞에 있는 것이 설령 황금이 아니고 물들어 떨어진 은행잎이라 할지라도,
나에게는 이미 이 이상의 재산이 없으며,
그것이 또한 그대로 황금이라 하더라도 이것을 털어,
이 소슬한 가을 대신, 꽃과 잎이 땅을 뒤덮는 5월을 살 수도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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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東里 (1913∼1995)
경상북도 경주출생.
본명 김시종.
1934년 조선일보 신춘문예당선.
1986.8 단군 개국 비 건립 추진위원회위원장.
1989 문인협회 명예회장.
1999년 한국예술 평론가협의회선정 20세기를 빛낸 한국의 예술인.
예술원상 및 3·1문화상 수상.
순수문학과 신인간주의의 문학사상으로 일관해왔다.
광복직후 민족주의 문학 진영에 가담, 우익민족문학론을 옹호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고유의 토속성과 외래사상과의 대립을 통해 인간성의 문제를 그렸고,
6·25이후에는 인간과 이념의 갈등에 주안을 두었다.
소설집 《화랑의 후예》《무녀도》《역마》《황토기》《등신불》《실존 무》등
평론집《문학과 인간》
시집《바위》수필집《자연과 인생》등
주옥같은 작품이 많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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