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의 여정 / 전광용
여행은 언제나 즐거운 것이다.
봄은 봄대로, 가을은 가을대로, 그리고 여름은 여름, 겨울은 겨울대로,
계절의 변화와 더불어 그대로 다 새로운 즐거움을 가슴 속에 안겨다 주는 청신제라고나 할까.
그뿐인가.
농촌은 농촌대로 전원의 유장한 목가적인 맛을,
산은 산대로, 바다는 바다대로 그것만이 지니는 독특한 자연의 시정을 선물하는가 하면, 새롭고 낯선 도시의 가로는 그것대로 흙 속에 파묻혔던 사람들에게 산뜻한 미지의 감각에 경이에 찬 눈동자를 뒹굴리게 한다.
그러기에 천하 명산 금강산도 계절에 따라 봉래, 풍악, 개골, 금강 등,
그 때마다의 승경의 아치를 상징하는 이명들을 가지고 있다.
새 움 트는 봄의 정경이 산책이나 소풍을 연상시키는 경쾌한 리듬이라면,
여름의 무르익은 녹음과 작열하는 태양은 그대로 바다의 유혹을 자극하는 정열 발산의 표정임에 틀림없는 성싶다.
앙상한 가지에 설경어린 겨울 시계가 남성적인 장엄미를 과시하는 것이라면,
사색이 곁들인 여정의 풍일은 아무래도 가을만이 간직한 자연의 격이 아닐 수 없는 것 같다.
가을!
그 음향의 여운 속에는,
그 너머의 첩첩한 시각과 굽이굽이 상념의 계속을 함께 함축하여 주는 낭만이 깃들여 있는 것만 같게 여겨짐을 어찌하랴.
티없이 맑게 트인 드높은 하늘을 끝없이 훨훨 날고만 싶은 충동은 가을만이 지니는 독점물인것만 같다.
먼지 속에 복닥거리는 도시의 소음을 잠시 외면하고,
놀진 저물녘 차창에 기대어 시골 초가집 지붕에 널어 말리는 빨간 고추와,
싸리 울타리에 늘어진 노오란 호박에 눈을 주며 엑조틱한 정감에 잠기는 것은,
비단 소녀의 값싼 감상쯤으로만 돌릴 것인가.
가을이라면 으레 곁붙는 푸른 하늘, 귀뚜라미, 기러기, 그리고 단풍과 낙엽,
이것들은 시인 묵객의 입에뿐만 아니라 어린이들 작문 구절에까지도 예사로 오르내려 이젠 좀 진부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것도 시간과 장소와 사람에 따라 씌어질 나름으로,
그 맛은 또 그 맛대로 전연 가셔진 것은 아닌 것만 같다.
가을 나그네!
그것은 현대 문명의 첨단의 하나인 제트기의 여로에서도 맛보지 말라는 법은 없으리라.
그러나, 아침을 서울에서 먹고 다음날 점심을 파리에서 먹어야 하는,
기계 문명을 현기증 나는 메커니즘 속에서는,
계절의 신비로운 순환의 아름다움을 제대로 느낄 수 있을지 자못 의심이 가시지 않는 바도 아니다.
그러고 보면 죽장 망혜 단표자의 옛 풍류는 아직도 산정의 진미 속에 천고여하게 자리잡고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가을' 하면 '나그네'와 더불어 떠오르는 추억이 한두 가지가 아니지만,
그 중에서도 부전 고원의 아침 해돋이,
자작나무 수풀을 건너 보이는 호반의 정회와,
금강산 상팔담의 사파이어같이 맑고도 푸른 물에 비낀 석양 무렵의 다감한 회포를 잊을 수가 없다.
그러나 지금은 휴전선 너머 먼 이방 마냥, 흘러가는 구름에 착잡한 회상만 얽힐 뿐이다.
운악산도 금강산과 같은 산맥 줄기여서 그에 비견할 수 있는 승경이라고들 하지만,
백보를 양보해도 금강의 절승에 견주면 해갈의 경지에도 닿지 못하는 끝없는 아쉬움이 감돌 뿐이다.
가을이 되면 어디론가 자꾸만 가고만 싶어지니, 이도 또한 병이런가.
그러나 막상 떠나려고 하니 갈 곳이 없다.
설악도, 지리도, 속리도, 한라도 다 한 번 보고 나면 다시 또 가고 싶은 그 이상의 구미를 유발하지 못하는, 그저 그만 정도의 것으로밖에 느껴지지 않으니 말이다.
그래도 이 가을을, 이 상량한 계절을 도심에서 새기며 그대로야 보낼쏜가?
유혹이 거듭되는 여정,
단풍이 좀더 짙어지면 가야산 유곡의 해인사라도 찾아야만이 가을의 병은 치유될 것만 같다.
가을은 소녀처럼 가슴 부푸는 계절,
더욱이 온 누리에서 가장 맑고 아름답다는 이 땅의 가을 하늘!
인공이 미비하니 천부에라도 기대볼까?
그 가을은 여수를 지겹게 안겨다 주기에 더욱 매력을 느끼는 것이나 아닐지.
전광용(1919~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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