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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歲月은 지금/10 월 .

수필 - '억새의 이미지' / 목성균

아즈방 2024. 10. 23. 12:30

 

억새의 이미지 / 목성균

가을걷이가 끝난 빈 들녘은 농부의 열망이 이삭처럼 널려 있기 때문인지,

막 저녁 밥상이 들어간 부엌같이 끓이고 자친 온기가 남아 있다.

억새는 그 고즈넉할 뿐 쓸쓸하지는 않은 시절의 대미(大尾)를 장식하는 들꽃이다.
억새꽃은 석양을 등지고 서 있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그래서 그 자리가 억새의 자리처럼 당연스럽다.
저녁 바람 이는 동구 밖 산모퉁이를 돌아들다가 표표히 나부끼는 하얀 억새꽃을 보면

나는 깜짝 놀라서 걸음을 멈춘다.

저무는 역광에 윤택한 빛깔을 유감없이 들어내는 억새의 도열이 나를 사열관처럼 맞이하기 때문이다.

아, 이 무슨 과분한 열병식인가!

나는 곧 제병관의 인도를 받으며 등장할 사열관을 앞질러 잘못 들어선 열병식장의

남루한 귀환병처럼 돌아서고 싶은데 억새들이 입을 모아 환성을 지른다.
“만세-. 수고하셨습니다.”
쥐뿔이나 무슨 수고를 했길래,

언제 한번인들 나를 위해서나 남을 위해서나 분발해본 적도 없으면서,

공연히 격앙(激昻)되어서 억새를 주목하고 걸음을 멈춘다.

 

억새는 우리 땅의 여분을 차지하고 자생하는 볏과의 다년생 풀이다. 

나무도 못 자라는 바람 센 산정 분지, 뙈기밭 두둑, 등 너머 마을로 가는 길섶, 

무덤 많은 야산 발치, 나루터 모래 언덕 같은데 군락을 이루고 자란다. 

억새는 자생 여건이 나쁜 버려진 자투리땅에 뿌리를 나리고,

씩씩하고 모질게 자라서, 늦가을 황량한 산야를 하얗게 빛내 준다.

 

억새는 여름날 꼴머슴의 낫질에 호락호락당하는 나약한 풀이 아니다. 

억새를 베려고 낫을 댔다가 섬뜩해서 보면 어느새 억새를 움켜쥔 손가락이

베어져서 피가 난다. 

억새 이파리는 소목장(小木匠)의 작은 톱 같이 자디잔 날을 날카롭게 세우고

자신의 의지를 위협하는 힘에 대해서는 완강하게 저항을 한다. 

억새는 이름처럼 억세고 기가 살아 있는 풀이다.
늦가을 석양빛을 등지고 서서 표표히 흔들리는 억새꽃의 담백한 광휘(光輝)를 보면,

여한 없는 한 생애의 마지막 빛남이 어떤 건지 알 수 있을 것 같다.

 

늦가을 석양 무렵 취기(醉氣)가 도도한 촌노(村老)들이 빈 들길에 죽 늘어서서

하얗게 가는 모습을 흔히 볼 수 있었다. 

뉘 잔칫집에서 파하고 돌아가는 길이다. 

가는 건지 서 있는 건지 한담을 하며 느릿느릿 움직인다. 

그러다가 마침내 언성이 높아지고 삿대질까지 오가는 언쟁으로 치닫는다. 

대개 별 것도 아닌 인생잡사(人生雜事)의 견해차를 가지고 다투는 것이다. 

삶의 방식에 대한 고집, 작고 필수적이었던 인생관을 주장하는 노경(老境)의

굽힐 수 없는 자존심이 억새꽃처럼 하얗다. 

겨우 일행의 중재로 다툼을 거두고 조금 가다가 일행의 다른 촌노들이 또 다른

견해차로 언쟁을 하면서 행렬을 멈춘다. 

그렇게 저무는 들길을 유유자적 걸어가는 촌노들, 

갓은 비딱하게 기울었고 두루마기 자락은 흩어져서 저녁 바람에 서걱댄다. 

그 모습이 얼마나 보기 좋은지 나는 목이 메어 속으로,

‘어르신네들 수고 많으셨습니다.’ 하고 인사를 드리지 않을 수 없다.
수고를 한 것은 그 분네들이다. 

간구하고 고난스러운 시대를 살아서 오늘에 이르게 해 주신 어른들이다. 

억새는 그 분들을 위해서 열병 대열을 짓고 있는 것이다. 

그에 앞서 내가 지나가면서 목이 메이는 까닭은 억새의 열병 자세의 진실성에

미치지 못하는, 부실한 내 삶에 대한 반성이다.

 

늦가을 강화도 해안 단애에 서 있는 억새를 본 적이 있다. 

호말 떼처럼 불어닥치는 강한 해풍에 숨이 차는 듯 서걱이면서, 

쓰러지는가 싶다가도 바람이 지치면 다시 일어서던 억새-. 

그 모습은 마치 흰 중의 적삼을 입은 개항기의 민병들이 마침내 무너질 필연의

보루(堡壘)에서 끝까지 버티던 가긍한 기개 같아 보였다. 

막을 수 없는 외세를 막아 보려는 어리석은 짓이 자랑스러운 것은 그 게 민족혼이기 때문이다. 

잘났든 못났든 오늘에 대한 과거가 고맙지 않은가. 

바람 부는 수난의 보루(堡壘)에 표표히 나부끼는 억새가 흰옷 입은 어른들의 감투정신 같아 보여서 눈물겨웠다.

 

억새꽃의 흰빛은 냉담(冷淡)의 빛이 아니다. 

내색은 않지만 참고 견뎌 낸 자신을 고마워하는 조선 여인들의 마음이 깃들인, 

메밀 짚을 태워서 내린 잿물에 바래고 또 바랜 무명 피륙 같은 흰빛이다. 

가을 햇빛이 쏟아지는 강변 자갈밭에 길게 펼쳐 널은 흰 무명 필을 본 사람은 생각했을것이다. 

거기에 무명 필이 널리기까지의 길쌈 공정과 앞으로 홍두깨 다듬이질을 거쳐 옷이 기워지기 까지 남은 침선 공정(針線工程)이 얼마나 여인네들의 노고를 필요로 하는 것인지를….

순전히 남정네들의 자긍심을 남루하게 둘 수 없는 여인의 마음,

억새 꽃 빛깔에서는 그런 마음씨가 느껴진다.

 

가을밤 달빛 아래서 사운 대는 억새를 보면 발갛게 등잔불이 밝혀진 방문의 창호지를 울리며 밤을 지새는 다듬이질 소리가 들려오는 것만 같아서 귀를 기울이게 된다. 

고부간에, 동서간에, 혹은 시올케 간에 마주 앉아서 맞다듬이질 하는 소리는 더없이 그윽하고 맑다. 

자지러지듯 빠르게, 멎는 듯 느리게, 크게, 작게, 

한없이 이어지는 맑고 애잔한 리듬, 

그것은 마음이 맞아야 낼 수 있는 소리다. 

혼연일체로 마주앉아서 시집살이의 애환과 갈등을 비로소 화해하는 소리다. 

그 소리를 들으면 동구 밖에서 억새가 달빛 아래 사운 대며 서 있는 것이 눈에 선이 보이는 것이다.
이제는 흰옷 입은 노인들의 권위 있는 행렬도 볼 수 없고,

가을 달밤에 들려오는 다듬이질 소리도 들을 수 없다.
가난하면서 가난을 가난으로 여길 줄도 모르고 성의껏 살던 삶이 사라져 버린

우리 땅의 여분을 차지하고 억새만 홀로 피어서 어쩌자고 저리도 고결스러운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