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素月
본명은 김정식(金廷湜)
본관은 공주.
서구 문학이 범람하던 시대에 민족 고유의 정서에 기반을 둔 시를 쓴 민족 시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생애
1902년 8월 6일에 평북 구성에서 태어났다.
1904년 처가로 가던 부친 김성도는 정주와 곽산을 잇는 철도 공사장의 일본인 목도꾼들에게 폭행당한 후 정신 이상자가 되었다.
이후 김소월은 광산을 경영하는 조부의 손에서 컸다.
김소월에게 이야기의 재미를 가르쳐 주어 영향을 끼친 숙모 계희영을 만난 것도 이 무렵이다.
남산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15년 오산학교에서 조만식과 평생 문학의 스승이 될 김억을 만났다.
김억의 격려를 받아 1920년 동인지 《창조》5호에 처음으로 시를 발표했다.
오산학교를 다니는 동안 김소월은 왕성한 작품 활동을 했으며, 1925년에는 생전에 낸 유일한 시집인 《진달래꽃》을 발간했다.
1916년 오산학교 재학 시절 고향 구성군 평지면의 홍단실과 결혼했다.
3·1 운동 이후 오산학교가 문을 닫자 배재고보 5학년에 편입해서 졸업했다.
1923년에는 도쿄상업대학교에 입학하였으나, 같은 해 9월에 관동대지진이 발생하자 중퇴하고 귀국했다.
이 무렵 서울 청담동에서 나도향과 만나 친구가 되었고 《영대》동인으로 활동했다.
김소월은 고향으로 돌아간 후 조부가 경영하는 광산일을 도왔으나 일이 실패하자 처가인 구성군으로 이사하였다.
구성군 남시에서 개설한 동아일보 지국마저 실패하는 바람에 극도의 빈곤에 시달렸다.
본래 예민했던 그는 정신적으로 큰 타격을 받고 술로 세월을 보냈으며, 친척들로부터도 천시를 당했다.
1934년 12월 24일 곽산에서 아편이라는 마약과다 복용으로 음독 자살하였다.
사후 43년 만인 1977년 그의 시작 노트가 발견되었는데, 여기에 실린 시들 중에 스승 김억의 시로 이미 발표된 것들이 있어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김억이 제자의 시를 자신의 시로 둔갑시켜 발표했던 것이다.
1981년 금관 문화훈장이 추서되었으며 서울 남산에 그를 기리는 시비가 세워졌다.
초기에는 민요조의 여성적이고 서정적인 목소리의 시작활동을 하였으나,
후기작 '바라건대는 우리에게 우리의 보습 대일 땅이 있었더라면' 등에서는 민족적 현실의 각성을 통해 남성적이며 참여적인
목소리로 기울었다.
"김소월의 시는 그 어느 것을 막론하고 향토적인 체취가 강하게 풍기고 있다" "한 마디로 전통적인 시인" - 조연현
"우리 민족의 문학적 생리에 배겨 있는 민중적·민요적 리듬을 가장 적절하게 건드려 준 시인" - 조병춘
"전래의 정한의 세계를 새로운 리듬으로 표현해 낸 것이며, 그런 의미에서 새로운 민요에 속한다." - 김현
"조선이라는 말을 쓰지 않은 채 조국의 산하에 지천으로 피고 지는 진달래라는 표상을 선택함으로써 겨레 감정에 호소한다.
그는 추상적인 관념에서 출발하지 않고 구체에서 출발하는 것이다.
이 하나만 가지고서도 그는 당대의 누구보다도 시인이요 터주시인" - 유종호
"우리 현대시사의 한 표준이며 역사" - 김용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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