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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을 바라보는 시선' / 김현정

아즈방 2022. 5. 20. 19:48

 

매일 아침 같은 시각 출근길에 마주치는 할머니가 한 분 있다.

허리가 기역자보다도 더 굽었다.

고개만 쑥 내밀고 거북이처럼 엉금엉금 걷는데,

놀랍게도 횡단보도 앞에만 서면 신호가 바뀔세라 부리나케 움직이곤 한다.

할머니는 폐지를 나른다.

한 몸 추스르기도 힘겨워 보이지만,

밀고 가는 보행기 위에는 언제나 폐지가 한가득이다.

아마도 길 건너 고물상으로 향하는 것이리라.

 

오늘도 어김없이 횡단보도 앞에 정차하고 서 있는데,

병원 옆길 골목 어귀에 할머니가 홀연 나타났다.

주름 사이 매서운 눈매로 잽싸게 신호등을 스캔하더니,

얼마 남지 않은 녹색 깜박등이 충분하다고 세었는지,

쪽 찐 비녀 옆 허연 머리숱을 흩날리며 사샤샥 순식간에 길을 건넌다.

살아있는 눈빛, 날렵한 발동작, 먹이를 앞에 둔 맹수 같은 집중력,

잉여의 권태나 기름기라곤 쪽 빠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폐지더미만큼의 삶의 무게.

나는 운전석에 앉아 그 모습을 넋을 빼고 바라보았다.

오! 노땅 테리블!

프랑스 작가 장 콕토의 소설에는 ‘앙팡 테리블’이라는 용어가 등장한다.

직역하면 ‘무서운 아이들’이라는 뜻으로,

생각이나 행동이 조숙하고 별난 아이를 가리키는 말이다.

또한 특정 분야에서 자신만의 방식으로 눈부신 성과를 올리거나,

거침없이 행보하는 젊은 인재를 두고, 일종의 찬사와 경외를 담아 부르는

용어이기도 하다.

은근 이 말 속에는 어린 세대의 두각에 대해 기성세대가 느끼는 난처함, 당혹감,

경계심, 나아가 공포감 등 복합적인 정서도 깃들어 있다.

그런데 요즘 이 다채로운 감정을 아이들이 아닌 노인들에게서 느낀다.

언뜻 노인이 되면 서로 비슷해져 버리는 외모만큼이나,

별다른 개성도 욕구도 필요 없이, 가만가만 살아가는 사람들일 것이라는 착각을

하기가 쉽다.

마치 여릿한 젊은 아가씨를 두고 이슬만 먹고 바람똥만 누는 사람 아닐까 하는

말도 안 되는 상상이 있는 것처럼, 노인에 대해서도 사용 연한이 다 된 폐물이라,

어디엔가 쭈그러져 그저 숨만 살살 쉬면서 조용히 살아야 한다는 비현실적이고도

폭력적인 환상을 들이댄다.

최근 커다란 사회적 파장을 일으켰던 사건들을 대하는 언론의 태도에서도,

이런 폭력적인 노인폄하 시각이 곳곳에서 읽힌다.

세월호 사건, 몇몇 화재사건, 성추행 사건, 심지어 남대문 방화사건까지 소급해가며,

“또 노인이야?”

마치 노인이면 있는 듯 없는 듯 잠자코 살아야지 웬 말썽이냐는 듯,

노인이 문제라는 식의 논리를 펼친다.

이런 접근은 문제의 핵심을 왜곡할 소지가 있다.

원인은 노인이라서가 아니다.

어느 나이에도 범죄를 일으킬 개연성은 있다.

노년층에 유독 사회 불평분자가 많다거나 노인들 성격이 과격해서가 아니다.

차라리 그만큼 현재 노인들이 처한 상황이 어렵다는 방증 아닐까?

 

칠순이 넘은 남자가 다리를 다쳐 병원에 실려 왔다.

꽤 깊었던 상처가 놀랍게도 일찌감치 다 아물었다.

“살성이 좋으십니다. 건강체질이세요. 백세까지 거뜬하시겠습니다.”

그러나 노인은 이 얘기를 덕담으로 받아들이지 않았다.

“오래 살까 봐 걱정인데 뭔 말이여? 난 언능 죽고 싶어.”

그는 수급자로서 매달 48만8000원을 받는데,

25만원 방세를 내고 나면 나머지 돈으로 빠듯하다고 한다.

우리는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노인빈곤율 단연 1위인 나라에 살고 있다.

미처 늙어보지 않은 사람에게 노년은 아직 가본 적 없는 나라다.

가본 적이 없단 이유로, 나와 다르다는 이유로,

노년을 섣불리 폄하하거나 부풀려 차별하진 않는가?

노인은 특이한 인종도, 격리되어야 할 집단도 아니다.

생존과 자아실현의 욕구를 여전히 생생하게 지닌 누구와도 다름없는,

보통의 사회 일원이다.

 

김현정 / 서울시립병원 정형외과전문의

 

* 출처 : 한겨레  2014. 8. 13. [세상 읽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