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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주의 하천 - 금성천(錦城川)

아즈방 2022. 4. 30. 10:41

금성천 (錦城川)

 

북제주군 관내 대부분의 하천은 곡폭이 좁고 곡의 발달이 미약하여 하천의 길이가 짧은게 특성이다.

일명 정자천(亭子川, 綎자천, 정지내, 정짓내)이라고도 불리는 금성천도 곡폭이 그다지 넓지 않고, 호우가 내릴 때는

일사천리의 격류가 되나 맑게 개인 수일 후에는 잡초가 무성한 건천이 된다고 한다.

그러나 북군지역에서는 드물게 하천 길이가 15㎞이상 되는 비교적 긴 하천이다.

금성천은 성곽터를 비롯한 많은 역사 유적을 간직하고 있는 애월 금성리와 봉성리, 어음리, 한림 귀덕리를 사이에 두고

있는 하천으로 주민들에게는 많은 애환이 서려있는 곳이기도 하다.

금성천의 지형도상 발원지는 해발 7백10m.

그러나 직접 답사해보면 이보다 훨씬 높은 한대오름 해발 9백m 지경에서 발원하고 있음이 확인된다.

곡두(谷頭) 부근의 실개천과 같은 수많은 지류가 모아져 본격적인 계곡의 형태를 띄기 시작하며,

고도의 차이는 있지만 서로 다른 곳에서 발원한 수많은 소하천들이 하류로 이어지면서 계속 합류하는,

복잡한 하계밀도를 보인다.

이 가운데 가장 높은 지점에서 발원한 하천은 검은들먹오름과 다래오름 일대에서 계곡 방향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이와는 별도로 괴오름과 폭낭오름 주변에서 발원한 또 다른 주류가 새별오름(샛별오름)과 이달오름을 거쳐,

비로소 애월읍 어음2리 해발 220m지경에서 한대오름 줄기와 합류한다.

이어 봉성리 구몰동 선운정사 하류에 이르러 어음천과 만나 해안까지 이어지고 있다.

금성천은 이렇듯 상류에서 수없이 많은 줄기들이 잇따라 합류, 복잡한 하계밀도를 보이다가 하류에 이르러 대천을

이룬다.

새별오름(曉星岳, 眞星岳)은 금성천 유로(流路)의 분수령이 되고 있다.

서북 방향으로 이어지던 금성천의 유로가 새별오름을 만나면서 급격하게 북쪽 방향으로 바뀌고 있는 것이다.

금성천의 유로와 지형 지질도 주변 오름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고 있다.

하천의 발원이 오름 일대에서 이루어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상류 복잡한 하계밀도가 주변 오름군(群)에서 비롯되고 있다.

하상 상당 면적이 상류 일부 구간을 제외하고는 오름에서 비롯된 흑색화산회토로 덮여 있는데서도 이를 입증한다.

금성천은 하류에 이르러  애월읍과 한림읍을 경계짓고 있지만 애월읍 주민들과 더욱 밀접한 연관을 맺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유역 마을이 하류 금성리를 비롯해 봉성리(구몰동, 화전마을 ), 어음1․2리등 애월읍에 집중돼 있음이 이를 말해준다.

주민들은 하천에서 샘솟는 용출수와 빗물을 저장, 귀중한 식수와 농업용수를 공급받았으며,

목축의 수단으로 이용 하기도 했다.

하천수는 때로는 범람원이 돼, 엄청난 재앙을 부르기도 했지만 주민들은 곳곳에 당신(堂神)들을 모셔 자연에 순응하며

마을의 안녕과 풍요를 기원했다.

금성천 유역 곳곳은 아직도 삶의 애환과 역사흔적들이 배어난다.

4․3의 상흔과 화전마을 자취, 목호의 제주지배를 종식했던 새별오름 전적지 등은 그 사례들이다.

4․3 당시 쌓았던 城의 잔해는 물론 상류에서는 피난생활의 흔적으로 보이는 움막터들도 여러곳에서 확인된다.

봉성리(어도리), 화전마을, 발이오름 등은 4․3의 아픈 기억들이 서려 있는 곳이다.

금성천 상류에서 확인되는 화전경작은 4․3의 발발로 중산간 마을이 소개되고,

1968년 화전정리법이 제정돼 법으로 금지되면서 역사속으로 자취를 감춘다.

그러나 아직도 희미하게나마 화전민들의 주거지가 남아 있으며,

그들의 활동무대였던 드넓은 초지와 공초왓이 선인들의 삶을 되돌아보게 한다.

금성천 중류에 위치한 애월읍 봉성리는 재산무장대와 토벌대 양측 모두에게 피해를 입었던 대표적인 마을이다.

1949년 12월 17일(음) 새벽 재산무장대의 습격으로 마을이 불타고 주민 30여명이 희생됐다.

아침에는 해안에서 올라온 군인들이, 산사람들과 내통했다며 마을주민 수명을 끌고가 처형했다.

이러한 4․3의 소용돌이 속에서 1백50여명이 희생되었다.

주민들은 마을 이름 때문에 궂은 일이 많이 생긴다 하여 어도리(於道里)였던 마을이름을 4․3 이후 봉성리(鳳城里)로

바꾸어 버렸다.

봉성리 신명동은 4․3으로 새롭게 생겨난 마을이다.

1948년 11월, 군경토벌대의 초토화작전으로 중산간 마을 대부분이 불에 태워졌다.

봉성리 주변 자연부락인 자이동, 월각동, 화전동 등 6~7개의 자연부락도 이때 없어졌다.

봉성리 본동으로 소개되었던 자연부락 사람들은 잃어버린 마을 대신에 새로운 삶의 터전을 일구기 시작했다.

그때부터 지금까지 이어온 마을이 신명동인 셈이다.

금성천 본류를 따라 올라가다 보면 어음1리 하천변에 4․3 당시 쌓았던 성의 잔해가 있다.

발이오름과 금성천 사이의 참나무숲에 있었던 자연부락 `북케초남밭' 역시 4․3으로 사라져 버린 마을이다.

지난 93년에는 발이오름 동굴에서 피난생활을 하다 토벌작전에 의해 사망된 것으로 추정되는 유골이 발견되어 충격을

주기도 했다.

한라산 밀림으로 접어드는 금성천 상류 주변에는 4․3 당시 피난생활의 흔적으로 보이는 움막터들도 여러곳 눈에 띤다.

피난민들은 혹한의 한라산에서 추위와 토벌대의 눈을 피해 땅을 파고 움막을 지어 원시인 같은 은거생활을 해야했다.

피난민들의 은거지는 식수를 쉽게 구할 수 있는 하천을 가까이 할 수 밖에 없었다.

금성천 상류에 해당하는 검은들먹오름과 한대오름 서북측 언저리에는 한림읍과 애월읍 주민들이 집단 피신했던 것으로

전해진다.

 

* 출처 한라일보 대하기획 '한라산학술대탐사' 제1부/ 생명의 근원, 하천과 계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