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56년 이른 봄,
전쟁으로 갈갈이 찢어진 서울 명동의 주점 ‘은성’에서,
박인환 시인과 이진섭 작곡가, 나애심 가수 등이 만납니다.
술을 마시던 박인환은 즉흥적으로 시를 써서 이진섭에게 보여주었고,
이진섭은 그 시에 곡을 붙입니다.
악보를 본 나애심은 즉석에서 노래합니다.
나애심이 돌아간 뒤 합석한 임만섭 테너가 정식으로 다듬어 부르자 즉석 음악회가 되었습니다.
이 일이 있은 일주일 뒤인 3월 20일, 박인환 시인이 심장마비로 급사해,
‘세월이 가면’은 그의 절명시가 되어버립니다.
시인의 대표작이 꼭 오랜 시간의 고통으로 나오는 것은 아닙니다.
진통 끝에 탄생하는 명작도 있지만 불시에 시마(詩魔)의 방문을 받고 짧은 시간에 쓴 시가 명작의 반열에 오르는 경우도 있지요.
이 시가 그러합니다.
‘세월이 가면’은 박인희 가수가 부르면서 많은 대중의 사랑을 받아 불후의 명곡이 되었습니다.
제가 KBS 기자를 할 때 라디오 〈박인희예요〉 프로그램에 초대받은 적이 있었습니다.
그때 고정 게스트 요청을 받았으나 취재 활동에 바빠 응하지 못했었지요.
지금도 아쉬워하는 제 생애의 한 부분입니다.
시인은 누구를 이렇게 애타게 그리워했을까요?
아마도 전쟁으로 사라져 간 많은 사람일지도 모릅니다.
아니면 시인 개인과 인연을 맺은 사람일 수도 있겠지요.
시인의 고향인 강원도 인제의 박인환 문학관을 방문했을 때,
제가 머무는 한 시간여 동안 이 곡이 반복해서 흐르고 있었습니다.
망우리 시인의 묘비에는 이 시의 첫 구절이 새겨져 있습니다.
‘세월이 가면’은 저의 오랜 애창곡입니다.
젊은 시절부터 흥얼거리며 다녔고, 노래를 시키면 부르는 18번이었지요.
이 노래를 부르면 저의 생애에 사랑으로 명멸했던 얼굴들이 떠오릅니다.
때로는 아련한 그리움으로, 때로는 어찌할 수 없는 안타까움으로 다가왔다 사라지는 모습들.
그 사랑의 힘에 의해 저는 오늘까지 지탱해올 수 있었습니다.
위대한 사랑의 힘을 느끼게 하는 저의 러브 송입니다.
유자효 / 한국시인협회장·전 KBS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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