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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歲月은 지금/8 월 .

에세이 - '분꽃' / 김재희

아즈방 2024. 8. 12. 10:20

 

분꽃 / 김재희 

 

저녁나절 살랑대는 바람에 마음 자락이 헛헛하다.

어려서부터 이맘때쯤이면 가끔 콧물을 훌쩍이곤 했다.

특별히 뭔가가 서러워서도 아니고 억울해서도 아니다.

그냥 아무 이유도 없이 막연히 허전하곤 했다.

그럴 때 위안을 받는 것이 있다.

화단에 핀 분꽃이었다.

온종일 입 다물고 있다가 저녁나절이면 봉긋이 피어나던 분꽃은 꼭 나를 향해 웃어주는 것 같았다.

 

큰딸이면서도 나는 어머니와 그리 살가운 정을 나누지 못했다.

어머니로서는 맨날 병치레만 하는 딸이 그리 미덥지 않으셨는지 마음에 들지 않아 하셨다.

나 또한 그런 어머니에게 곰살맞게 굴지 못했다.

그럴라치면 자꾸 더 야단을 맞고 그것이 억울해서 눈물을 훔치곤 했다.

그럴 때마다 분꽃은 큰 위안이 되어 주었다.

까만 씨 속에 하얀 분말가루처럼 포근함을 느끼게 해주었다.

 

세월이 흘러 결혼도 하고 아이도 낳아 엄마 노릇도 했다.

어머니는 나에게 “너 같은 딸년 낳아서 키워보면 내 심정 알 것이다.”라고 하셨지만,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는 딸이 없어서 그때의 어머니 심정을 지금껏 이해하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왜 아무것도 아닌 일에 그리 서러움을 느끼곤 했을까.

어쩌면 내가 그렇듯 병치레로 마음 고생할 것을 암시하는 것이었는지도 모르겠다.

아니, 어머니와의 관계가 이리되리라는 암시였을까.

솔직히 지금도 어머니에 대한 애틋한 마음이 별로 없다.

그러면서도 어머니가 요양원에 가시는 날은 왜 그리 눈물이 났는지 알 수가 없다.

도대체 어머니와 나는 어떤 인연이기에 이리 묘한 감정만 돌고 있는 걸까.

 

어머니와 나는 숨바꼭질을 하고 있는 것 같다.

꼭꼭 숨어있는 마음을 찾아 이리저리 헤매고 있는 사이.

이제 그만 이 술래잡기를 끝내고 싶은데 아직도 아닌 것 같다.

내가 그리 눈물을 흘린 것은 이 때문인 듯하다.

아직도 나는 술래라는 것…….

 

요양원을 지척에 두고도 자주 가지지 않는다.

어느 땐 요양원 근처까지 가서 건물만 바라보다 오기도 한다.

빙빙거리기만 하는 이 마음을 어떻게 해야 할까.

나도 내 마음을 어찌할 수 없는 것이 아쉬울 뿐이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분꽃을 바라보고 있으면 마음이 안온해진다.

어린 시절 저녁나절을 생각하게 되고 그때의 감성이 되살아난다.

어머니의 냄새 같기도 하고 내 눈물의 흔적 같기도 하다.

어머니의 꾸중이 마냥 서럽기만 했던, 그 헛헛했던 날들의 기억이 왜 이런 감정으로 되살아날까.

참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런데 그 감정이 그리 싫지만은 않는 것은 또 무슨 조화일까.

자꾸 삭막해져 가는 마음 구석에 오롯이 남아 촉촉함을 유지해 주고 있다.

사람의 감정이란 꼭 좋은 것만을 생각하고 싶은 것은 아닌가 보다.

마음 아픈 상처도 나름대로 기억하고 싶은 일일 것이다.

아픔이 있었기에 다른 일들이 고맙게 느껴지기도 하고 살아갈 힘이 생기기도 하는 것 같다.

내가 베란다에 분꽃을 심은 것도 그 감정을 더욱 깊이 느껴 보고 싶은 것 아닐까.

어쩌면 이제 요양원을 벗어나지 못할 것 같은 어머니에 대한 마음을 잊지 않으려는 심정인지도 모르겠다.

 

요즘, 저녁녘이면 베란다에선 어머니의 젖내가 물씬 풍긴다.

 

* '수필과비평'  2022년 11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