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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歲月은 지금/9 월 .

수필 - '벌초(伐草)' / 박성목

아즈방 2024. 9. 7. 13:32

벌초(伐草)

 

음력 팔월 첫째 일요일, 친족들이 모여 벌초하는 날이다.

새벽에 일어나 서둘러 승용차를 타고 아들과 같이 고향으로 향했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씨다.

남부지방으로 태풍이 올라오고 있다는 일기예보다.

비가 오거나 태풍이 불어도 문중벌초 날짜는 변동이 없다.

 

서울에서 경북에 있는 선산(先山) 기슭에 도착하니 굵은 빗줄기가 눈앞을 가로막는다.

비옷을 차려 입고 아버님, 어머님 산소로 올라갔다.

형님과 조카들도 왔다.

문중벌초가 시작되기 전에 부모님 묘소 벌초부터 먼저 해놓기 위해서다.

제멋대로 자란 풀들이 길을 막는다.

해마다 벌초를 하지만 올 때마다 산소는 온통 풀숲이 뒤덮고 있다.

 

아들이 예초기(刈草機)를 들고 나섰다.

고요하던 산골짜기에 기계 돌아가는 소리가 요란하다.

십여 년 전까지만 해도 낫을 들고 벌초를 했으나, 시간도 많이 걸리고 또 힘이 들어 예초기를 구입했다.

요즘은 부탄가스 통을 끼워서 쓰는 예초기가 있어 무게도 가볍고 성능도 좋아 벌초하기가 한결 수월하다.

한 시간 정도 제초 작업에 부모님 유택이 훤해졌다.

 

빗줄기가 점점 더 굵어지는 가운데 산등성이를 넘어 선조 묘소 십여 기(基)가 모셔져 있는 곳으로 갔다.

벌초를 하려고 집안 어른들과 젊은이들이 원거리에서 모여 들었다.

일 년 중 모듬 벌초 하는 날 한 번씩 만나는 얼굴들이 많다.

서로 안부를 묻고, 아들이나 손자를 처음 데리고 온 사람들은 친척들에게 인사시키기에 바쁘다.

 

나는 결혼하기 전부터 아버지를 따라 문중벌초에 나갔다.

자식들 앞세우고 다니기 좋아하시는 아버지 성정 때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문중 벌초에 나오기 시작한 지도 어언 사십여 년,

오늘은 아들을 데리고 벌초에 나서고 있다.

참으로 긴 세월이 강물처럼 내 곁을 지나갔다.

이제 아들에게 자리를 물려주어야 할 때가 된 것 같다.

먼 곳에 있는 아들을 문중 벌초에 참여하게 한 것도 이런 연유 때문이다.

 

태풍의 위력을 차츰 실감케 하는 비바람이 몰아치는 가운데,

예초기 십여 대가 굉음을 내며 산골짜기를 울렸다.

많은 남정네들이 부지런히 힘을 보탰다.

드넓은 묘역이 금방 말끔하고 단정한 모습이 되었다.

비가 내리는 가운데 벌초에 참여한 후손들이 모여 시제를 지냈다.

 

벌초 후 이 곳에서 문중회의를 하고 점심식사를 할 계획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비 때문에 마을에 있는 문중 재실로 장소를 옮겨야 했다.

그리 넓지 않은 재실에 한꺼번에 많은 사람들이 몰렸다.

평소에는 사람 구경하기도 힘들었던 재실이 오늘은 앉을 자리도 없이 복잡하고 왁자지껄하다.

식당에 예약한 음식이 배달되어 차려졌다.

방안에서부터 어른들이 자리를 잡았고, 각자 앉을 자리를 찾아 점심식사를 했다.

문중 행사에는 어디를 가나 백부, 숙부, 아재, 형님, 조카 등 서열이 분명하다.

문중회의가 열렸다.

 

오후 벌초가 시작되었다.

몇 사람씩 조를 지어 이 산 저 산에 산재해 있는 선조 묘소를 찾아다니며 벌초를 했다.

그 때마다 나는 아들과 조카들에게 여기는 너희 몇 대 조부, 조모 묘소라는 설명을 잊지 않았다.

말하자면 아버님으로부터 물려받은 선산 벌초를 이제 아들에게 물려주는 의식인 셈이다.

 

길도 없는 산속에서 선조 산소를 찾는 것이 쉬운 일은 아니다.

무엇보다도 발걸음을 옮기기도 힘든 우거진 숲과 빽빽한 나무들 때문에 산으로 들어가기가 겁이 난다.

내가 어렸을 땐 이 선산이 거의 민둥산이었는데, 오십여 년 세월에 고향산천은 이렇게 변했다.

우리 삶이 넉넉해지니 자연도 풍요로워 진 것인가.

 

내가 살아 있고 걸을 수 있는 동안은 숲을 헤쳐 가면서라도 벌초에 참여하려 한다.

그러나 다음 세대, 또 그 다음 세대에 가면 벌초가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다.

글로벌 시대에 바쁘게 살아가는 젊은이들에게 연중행사로 닥치는 벌초는 번거롭고 힘든 일이다.

그에 따라 벌초 대행업체도 등장하고 있다.

돈만 내면 벌초도 해 주고, 묘지 관리도 해 주니 쉽고 편하다.

그렇지만 후손으로서 조상을 섬기고 추모하며 내 뿌리를 소중히 여기는 마음마저 잊어 버려서는 안 될 일이다.

 

요즘은 집안 제사도 그 횟수를 줄이는 가정이 많고, 장례식도 거의 화장으로 옮겨가는 추세다.

이제는 납골당이니 수목장이니 하는 말도 자연스럽고 또 그렇게 많이 행해지고 있다.

앞으로 우리 장례문화도 어떻게든 달라지고 변해 갈 것이다.

 

하루 종일 비바람을 맞으며 벌초를 하다 보니, 옷은 흠뻑 젖었고 피곤해서 발걸음이 무겁다.

그러나 듬직한 아들을 앞세우고 선산을 내려오는 마음은 가볍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