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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歲月은 지금/9 월 .

에세이 - '백로(白露)' / 목성균

아즈방 2024. 9. 7. 06:30

 

백로(白露) / 목성균

 

아침마다 골짜기에 짙은 안개가 자주 끼면 백로다.

자욱한 이슬 장막에 싸여서 아무것도 안 보인다.

다만 앞 냇가에 서 있는 미루나무의 헌칠한 모습만 희미하게 보이는데,

가는 여름에 대한 나무의 감출 수 없는 아쉬움이 우수를 느끼게 했다.

 

그러나 해만 뜨면 서서히 안개가 걷히면서 새며느리가 본 시아버지의 밥상처럼 정갈한 텃논 다랑이가

모습을 드러낸다.

연노란 올벼 이삭들의 다감다정한 무게가 가득 담긴 텃논 다랑이-.

꼭 맘먹고 담은 밥사발처럼 소복하다.

 

결실이 끝났다.

얼마나 잘 여무느냐 하는 것은 절기가 알아서 할 일이지 더 이상 농부의 소관 사항이 아니다.

네 농사가 더 잘 되었느니 내 농사가 더 잘되었느니 왈가왈부할 필요도 없다.

추수 때까지 겸허하게 기다릴 일이다.

 

안개가 걷힌 텃논 다랑이는 옥구슬을 뿌려 놓은 듯 이슬이 조롱조롱했다.

햇살이 퍼지면 이슬방울들이 어느 왕비의 능에서 출토한 부장품처럼 숨겨 두었던 영롱한 빛을 발했다.

 

백로는 태양의 황도(黃道) 위치에 따라 만든 절후표(節侯表)의 열다섯 번째의 절기다.

백로 때 안개가 내리는 것은 찌는 듯했던 여름 대기를 씻어 내는 자연의 자정작용(自淨作用)으로,

햇볕을 허실없이 투과(透過)시켜, 식물들의 결실을 여물게 하기 위한 조물주의 책임 있는 조치(措置)다.

 

아침에 안개가 끼면 한낮의 햇볕이 얼마나 따가운지,

늙으신 농부(農婦)의 조락(凋落) 같은 머리카락 몇 올이 부지하고 있는 정수리의 살갗을 여지없이 벗겨 놓을

지경이다.

그래서 옛날에 내 할머니는 ‘장바구니(정수리) 다 벗겨진다.’시며,

오뉴월 폭양에도 한 쓰시던 무명 수건을 꼭 머리에 쓰고 들에 나가셨다.

 

이때 들머리에 서 있으면 모든 곡식과 나무와 넝쿨과 풀들이 씨방 채우는 동화작용 소리가,

골짜기 저 아래 초등학교 가을 대운동회의 함성처럼 아득하게 들린다.

 

백로 때의 들녘은 마치 대운동회날의 점심시간같이 한가롭다.

여름날, 숨가쁜 농부의 허둥대던 소리의 여운이 남은 빈 들은 목이 터지라고 외치던 응원 소리와,

작은 발자국이 힘을 다해서 내닫던 숨찬 소리를 잠시 제자리에 놓아두고,

청군 백군이 모두 점심을 먹으러 간 빈 운동장 같다.

농부들이 어정거리던 들머리는 맑은 햇살만 내릴 뿐 본부석 천막 아래처럼 아무도 없다.

 

잠시 후, 확성기에서 오르간 소리가 울려 퍼지면 5, 6학년 여학생의 율동으로부터 운동회의 오후 순서가

진행되듯, 한로(寒露)가 지나면 농부들은 갈걷이를 하러 들에 나올 것이다.

그때가지 농부들은 운동장 가장자리 펄펄 끓는 국밥 솥 곁에서 학부형들과 얼굴이 벌개서 크게 웃는

선생님들처럼 들녘 가장자리의 주막에서 적조했던 친구들과 그렇게 어울린다.

그 소리가 아련히 들판을 건너온다.

그게 백로때 들을 수 있는 소리다.

 

나는 백로때의 윗버들미의 들녘이 좋다.

농부들이 물러난 빈 들에 나가서 맑은 바람과 정갈한 햇살을 내 맘대로 쪼여진 눈치 볼 일이 없기 때문이다.

백로의 들녘에 서 있으면 곡식이 맑은 바람과 햇살 먹는 소리만 막잠 잔 누에 뽕 먹는 소리처럼 사그락거릴

뿐이다.

 

'Osennyaya Pesnya'(가을의 노래) / Anna Germa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