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11월을 좋아한다.
가을 같기도, 겨울 같기도 한 그 모호함이 좋다.
책장을 넘기듯 분명하게 가르지 않고 다 어우르는 넓은 마음 같아서다.
떨어지는 나뭇잎, 두 장 남은 달력,
그림자를 길게 드리우는 옅은 햇살들이 쓸쓸하고 허전하게 하면서도,
아직 한 달이 남았다는 위안을 주어서 좋다.
곰곰이 생각하면 11월이 여간 좋은 게 아니다.
어릴 적 11월은 풍성한 달이었다.
시골에서는 벼를 베면 그 자리에 길게 줄가리를 쳤다.
그러고는 보리파종을 끝내고 콩이며 고구마를 수확하여,
저장을 다 마친 뒤에야 벼 타작을 했다.
타작을 끝낸 마당에는 짚으로 된 두지가 만들어지고,
축담에는 벼 가마니가 쌓였다.
곳간과 빈방마다 곡식이 차곡차곡 들어찼다.
한 해 농사를 마무리했다는 안도감과 가득 찬 곡식을 보며,
마음마저 넉넉해지는 11월이었다.
곡식으로 풍요로워지는 것은 사람만이 아니었다.
마당 구석구석에 떨어져 있는 낱알 덕분에 닭들도 포식하는 달이고,
쥐와 새도 먹이 때문에 다툴 일이 없는 달이었다.
11월에는 바다도 풍성해진다.
태풍과 적조를 이겨낸 굴은 김장철에 맞춰 알이 튼실해지고,
우렁쉥이는 돌기까지 통통해진다.
여름을 지난 물고기들이 저마다 살이 오른다.
갯벌의 낙지도 다리가 가장 굵어지는 때이다.
냄새에 이끌려 집나간 며느리가 돌아온다는 전어구이도 그 맛이 절정에
이른다.
11월은 생명을 느끼는 달이기도 하다.
벼를 벤 논을 갈아 보리씨를 뿌리면 얼마 가지 않아 초록색 잎을 내민다.
아기 손가락만큼 자라면 더 자라지 않고 추위에 대비한다.
어린잎의 색깔만 짙어간다.
한 겨울이 되어 아무리 매서운 바람이 불고 눈이 쌓여도 얼지 않기 위해서다.
벌판의 다른 풀들이 누렇게 변한 때에 저 혼자 파랗다.
그 짙은 초록 잎에서 강인한 생명력을 본다.
나뭇잎이 떨어진 빈 자리에 이듬해 틔울 싹을 잉태하는 달도 11월이다.
새 눈을 만들어서 보이지 않게 그 위를 여러 겹으로 싸 겨울을 난다.
떨어진 잎은 새 잎을 키울 거름이 된다.
생명의 순환이다.
탄생하고 떨어지고 다시 거름이 되는 자연의 질서가 그 속에 있다.
먼 바다로 나갔던 연어도 모천으로 돌아와 수많은 생명을 잉태시키고,
장엄하게 생을 마감하는 때도 이즈음이다.
탄생하고 사라지는 것이 어디 이뿐인가.
한해살이 들풀도 홀씨를 바람에 날리고 조용히 흙으로 돌아간다.
이 달에 생성하고 사라지는 자연의 순환을 본다.
11월에는 멀리 떠났던 철새들도 겨울을 나기 위해 돌아온다.
수십만 마리가 까맣게 하늘을 덮기도 하고,
때로는 몇십 마리가 선두를 따라 줄을 서거나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가기도 한다.
마치 배가 선단을 이루어 하늘을 항해하는 것 같다.
옛 시인은 대동강에서 흘러가는 물만 있고 되돌아오는 물결은 없다고,
이별을 노래하며 슬퍼했다.
철새는 대동강물과는 달리 떠나는 것은 보이지 않고,
돌아오는 새들만 물결처럼 보이니,
11월은 해후의 달이라 할 만하지 않을까 싶다.
봄날 새벽에는 새들이 짝을 찾느라 재잘거림으로 분주하다면,
가을 저녁에는 대나무 숲에서 보금자리를 찾느라 날갯짓으로 분주하다.
새들이 푸드득대는 소리와 댓잎이 스치는 소리가 어둠을 재촉한다.
이쯤에서는 이엉을 엮다가도 그만 손을 놓아야 한다.
새벽 물안개가 가장 아름다운 달도 11월이다.
강가에서 서서히 피어나 나무의 끝부분만 남기고 포복하는 병정처럼,
서서히 퍼져간다.
갈대숲을 어루만지고 잎을 떨 군 나무도 쓰다듬는다.
그 속에서는 신비스런 동화의 세계가 펼쳐지는 것 같다.
저녁녘에는 밥짓는 연기가 마을 골목을 마치 순찰이라도하듯 서서히 돌아나온다.
이때 연기는 매캐하지가 않고 구수한 밥 냄새가 배어난다.
빈 들판에서 바라보는 낙조와 골목을 돌아 지붕 위로 피어오르는 연기는,
기억 속의 정겨운 고향 모습이다.
11월은 고향을 더욱 그립게 한다.
음력 시월은 양력으로는 대개 11월이 되는데 예부터 상달이라 불렀다.
상달이란 달 중에서 으뜸이고 시작하는 달이다.
1년 농사가 마무리 되고 새 곡식과 과일을 거둬들여 신과 조상에게 감사의
예를 올렸다.
수확과 더불어 신과 인간이 함께 즐겼다.
모든 결실을 자신의 수고로움이 아닌,
자연과 신에게 돌리는 겸허함이 그 속에 있었다.
기뻐하고 감사하여 충만해지는 상달이었다.
사람의 일생을 열두 달에 빗대어본다면 나는 몇 월쯤에 와 있을까.
어쩌면 내가 좋아하는 11월의 중간쯤에 서 있는지도 모른다.
계절로 본다면 아마 늦가을쯤이 아닐까 싶다.
엉겁결에 스쳐버린 봄, 정신없이 허둥댔던 여름.
생각하면 한없이 아쉽기도 하다.
이제 더 이상 나아가지 않고 여기서 한참은 머무르고 싶다.
11월의 정령이 오래오래 내 소매를 붙들어 주었으면 하는 마음이 간절하다.
생명과 조락이 함께하는 풍요롭고도 쓸쓸한 달,
후회하고 허전해하기보다는 마지막 남은 햇볕을 감사하며 아끼는 마음으로,
나는 11월에 머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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