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엽단상 / 배점옥
지난주까지만 해도 찬란하리만치 샛노랗던 은행잎들이,
가을의 풍요로움 속에 넉넉한 마음을 불어넣어 주더니만,
주말을 보내고 나니 이게 어인일인가?
마냥 찬란한 황금빛으로 그 영광을 누릴 것 같았던 가로수에,
한바탕 돌개바람이 휩쓸고 지나가더니,
낙엽들은 아스팔트에 나뒹구는 신세가 되었다.
바람은 가축 무리를 몰 듯이 뒤엉킨 낙엽을 뒤쫓아갔다.
설상가상으로 도로를 누비는 육중한 쇠뭉치에 내맡길 낙엽들의 운명이 안쓰럽기
그지없다고 느낀 순간,
나 역시 그들을 짓뭉갤 수밖에 없다는 막연한절망감이 엄습해왔다.
호머의 시에 이런 구절이 있다.
'사람은 나뭇잎과 흡사한 것,
가을 바람이 땅에 낡은 잎을 뿌리면 봄은 다시 새로운 잎으로 숲을 덮는다'고.
낙엽은 우리 인간에게 조락과 절망과 쇠퇴와 죽음으로 유혹하면서도,
살아가는 그루터기가 돼 주었던 것이다.
열매가 씨앗을 지니고 있 듯이, 사람들은 죽음을 속에 지니고 있으며,
더구나 가을 낙엽 속엔 서글픈 아픔이 느껴진다.
불혹의 나이에 접어들면서부터 생의 저쪽보다는,
이제 이쪽을 기웃거리기 시작한 것이 어언 십여년.
자나깨나 나의 화두는 오직 삶과 죽음,
이것이 목구멍에 걸린 생선가시처럼 수시로 내 의식 속에 걸치적거리고 있다.
그래서 니체, 루소, 톨스토이, 공자, 노자, 장자......등
이름하여 동서양 성현들의 발자취를 거의 섭렵하다시피 했건만,
마음의 답답함을 풀 길 없어 마냥 답보상태일 뿐이다.
해가 거듭될수록, 삶은 쓰디쓴 웃음으로, 무상함으로, 따뜻한 슬픔으로,
그 연한 속살을 드러냈다.
황량한 빈 가슴에 가을 바람이라도 한 자락 스치며,
또는 떨어지는 낙엽들을 바라볼 때면,
가슴 저미는 알싸한 슬픔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한 동안 정신적 좌절과 생활의 무기력함에 빠진다.
기분 전환도 할 겸, 경남미술대전의 서예 전시장을 관람했다.
전시장 안팎을 빽빽이 채운, 그것도 입선 작품들만의 전시회라니.
그 관람은 나의 마음에 보다 큰 반향을 불러일으키며 번져나가,
잊혀졌던 감각들마저 일깨웠다.
인간 군상들의 그 서글픈 몸부림이 나를 덮칠 것만 같은 환각에,
순간 정신을 놓쳤다.
한때, 산다는 것은 끊임없이 자기 자신을 창조하는 일이라고 여기면서,
정신없이 붓글씨 쓰기에 정진했다.
또 간간이 글도 쓰면서 사람의 삶과 가슴밭을 갈고, 다듬고, 경작하여,
그 소출을 맛보며 생을 무두질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깐,
여전히 생의 혼란과 허무와 죽음의 질곡에서 하염없이 입술거스러미를 물어뜯으며
생의 의미를 쫓아 방황하고 있다.
가끔은, 지워버리고 싶은 초로의 던적스러움이,
검은 거울 속에 얼룩져 있는 현실을 응시하면서,
반백 년 안에 '나'라는 존재는 이 지구상에서 완전히 없어질 것이라는 것에,
마음이 급급해지기 시작한다.
짧은 인생을 천 년 만 년이나 살 것처럼,
결단코 나만은 죽지않고 영생하는 목숨처럼 황홀히 부풀렸던 일만 가지 꿈,
명예와 사랑과 황금, 욕정...
이 모든 것이 바람에 떨어져 흙으로 돌아가는 낙엽의 그것과 무엇이 다르랴.
며칠 전 가게에 갔다오는데 가뜩이나 처진 어깨를 아예 주저앉혀버릴 것 같은 풍경
하나가 눈에 들어왔다.
넓게 보면 똑같은 무게의 애잔한 아름다움이요,
측은하게 생각하자면 한없이 연민을 불러일으키는 서글픈 풍경이다.
내 앞엔 칠순 남짓한 할아버지 한 분이 성치 못한 몸으로 한 손엔 지팡이를,
다른 손엔 아파트 울타리 쇠 난간을 붙잡고 한 발 한 발 걸음마를 하고 있었다.
그리고 또, 도로 건너편엔 한 손에 지팡이를, 다른 손엔 배우자인 듯한 할머니의
부축을 받으며 질질 끌려가다시피 가고 있는 인생의 노을을 접했다.
그 풍경에는 세월의 거센 물결이 켜켜이 쌓여,
굳은 살이 박힌 삶의 자국이 그대로 드러나,
휠 대로 휜 인생 여정이 고스란히 묻어 있었다.
그것은 형벌이었고,
살아있는 모든 것은 살아있는 무게만큼의 형벌을 지고 사는 것 같아,
숙연한 마음에 가슴 밑바닥까지 저려왔다.
그래, 이것이 인생의 진면목이고, 앙상한 나뭇가지에 대롱거리고 있는 낙엽이다.
어떻게 사는 것이 내 몫의 삶인지 회의(懷疑)가 인다.
자연의 일부인 사람이 사람답게 살기 위해선,
무엇보다 자연의 섭리에 순응해야 하는데,
나는 왜 이 흐름을 따르지 못하고 인생의 길목에서 미아가 되어,
이렇게 헤매고 있을까?
그냥, 삶은 한 조각 구름이 일어나는 것이요,
죽음은 한 조각 구름이 스러지는 것이라고 여기면서,
그렇게 단순하게, 단순한 삶이 마음을 평온하게 하고,
근원적인 눈을 뜨게 하는것이라고. 인도의 한 수행자가 말했듯이,
'온갖 세속적인 추구는 한 가닥의 불가피한 슬픔으로 끝날 수 밖에 없으며,
얻음은 흩어짐으로 끝나고,
세움은 부서짐으로,
만남은 헤어짐으로,
출생은 죽음으로 끝낼 수밖에 없다'고.
이 끝없는 혼란으로 언제까지나 흙탕물 속에 허우적거리기만 할 것이 아니라,
흙탕물도 흘러가는 동안에 마알갛게 가라앉을 날이 있을 것이다.
나를 둘러싸고 있는 번뇌와 고통도 때가 지나면,
드넓은 웃음으로 마련하게 된다는 지혜를 터득할 날을 기다리며,
가던 길을 멈추고 빈 하늘을 우러러본다.
- 2003신춘문예 경남신문 당선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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