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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歲月은 지금/9 월 .

수필 - '망치 고개와 구절초' / 이정순

아즈방 2024. 9. 10. 18:25

 

🌼 망치 고개와 구절초 / 이정순

 

우두둑 우두둑 우산 지붕 위로 떨어지는 가을비가 정겹다.

참았던 아이의 울음보처럼 가뭄 끝의 비소리를 들으며 망치고개로 온다.

북병산 자락을 향한 완만한 길에 위풍당당한 벚나무 아래 여름의 끝자락을 잡고,

상상화가 만발하게 피어있던 고개다.

이룰 수 없는 사랑이라는 슬픈 꽃말로,

속울음을 삼키다가 붉은 빛을 토했던 상사화는 꽃대로 남아있다.

에티오피아국의 마지막 황제가 이 길을 지나며 아름다움에 감탄했다는 일화로 황제의 길이라는 유래가 있다.

이 설을 두고 의견인 분분한데 대하여 허구냐 사실이냐에 나까지 가세하는건 아니다.

그저 이런 논쟁이 있었을 만큼 아름다운 가치로는 충분히 공감되는 길이다.

망치 고개에는 지난주까지만 해도 아기 손톱 같은 꽃망울을 달고 있던 구절초가,

붉은 상사화를 밀어내고 올망졸망 하얀 그리움으로 피어있다.

국화과의 여러 해 살이 풀로서 뿌리를 뻗으면서 번식하는 다년생 야생화다.

쑥부쟁이와 구분하는 방법으로 구절초는 마디가 아홉이라는 말만 믿었다.

그 말만 의지하고 들에 핀 꽃대를 잡고 암만 세어 봐도,

아홉마디로 딱맞아 떨어지지 않아서 확신을 할수가 없어서 혼란을 일으킨 적이 있다.

그 후에 5월 단오 무렵의 구절초는 마디가 다섯 밖에 안 된다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9월로 접어들면서부터 점차적으로 아홉 마디까지 늘려 가는 특성을,

가르쳐 준 이마저도 그것까지는 몰랐던 것이다.

 

선모초(仙母草)라고도 하는 구절초는, '어머니의 사랑'이라는 꽃말로,

조창인의 소설 '등대지기'에 등장하는 어머니와 접목시키는 내 개인적 버릇이 있다.

2년 동안을 매물도에서 기거하며 집필했다는 이 소설 속에는,

희망도 없이 아무렇게나 살다가 죽길 원하던 주인공 재우가 있다.

부모 형제에게 버림받은 배신감에 홀연히 등대섬으로 들어오면서 스스로를 학대하며 고립시킨다.

자신을 버렸던 어머니가 치매에 걸리자

영웅 대접을 받고 자란 형은 양심을 져 버리고 재우에게 떠맡긴다.

평생 용서하지 않겠다던 어머니가 막상 버려지자 자신이 모셔오게 된다.

이때부터 애정이라고는 없이 단 둘 뿐인 등대섬에서 母子는 사육에 가까운 동거가 시작된다.

어머니나 자신마저도 인간 생명의 존엄성이라고는 없다.

오직 등대에만 의지하다가, 폭풍이 심한 날 등탑에 엎드려 자살과 재해사의 애매모호한 경계에서 재우는 죽어간다.

아들을 알아보기는커녕 대소변조차 못 가리고 수족도 못 쓰던 어머니가,

비바람 속에서 위험을 무릅쓰고 등탑 꼭대기로 올라간다.

떨어질 듯 매달리며 등탑에 오른 어머니는 자신의 오줌으로 재우의 탈진을 막는다.

지독한 치매 상태에서도 어미로서의 본능적 사랑만은 존재했던 마지막 책장을 덮으며 책상에 엎드려 펑펑 울었던 기억으로 구절초 꽃말을 떠올린다.

이 땅의 모든 이치는 인연과보(因軟果報)의 법칙이다.

씨앗을 품을 직접적인 원인을 지닌 땅이라 하더라도,

씨 뿌린 누군가의 행위가 없었으면 결실이란 없다.

위풍당당한 벚나무며 상사화나 구절초도 이 법칙에 순응한 누군가에 의해서,

꽃대를 세우고 향기를 품었기에 아름다운 길이 된 것이다.

결국 사람은 아는 만큼 보이고 말은 생각대로 쏟는다.

쏟았던 그 말의 기류가 따라 흐르다가 어느 지점에서 결실을 맺는다.

망치고개 길섶이 잡초로 덮여 있는 게 당연한 일일 수 있지만,

씨를 품은 은신처로 가꾼 자로부터 더할 수 없는 값진 땅으로 거듭났다.

카메라 초점을 맞추기 위해 구절초 가까이로 몸을 낮추니 향기가 은은하다.

예쁜 표정 뒤에 가시를 숨겨놓은 그런 꽃이 아니라서 좋다.

돋보이고 싶어 안달하며 저 혼자 우뚝 피기보다,

손에 손을 맞잡은 듯 무리 지어 핀 구절초 꽃잎 위로,

가을비는 여전히 내리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