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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歲月은 지금/9 월 .

수필 - '추석(秋夕)' / 김상분

아즈방 2024. 9. 17. 06:30

 

추석(秋夕) / 김상분

 

건들바람이 일고 점점 짧아지는 해를 보며 마음이 분주해진다. 

올 추석은 양력으로 며칠일까? 

따로 적어둔 데가 있건만 노파심에 음력이 적힌 날짜를 다시 짚어 본다. 

한 보름 전부터 마음을 다지기 시작하는 것도 여전하다. 

제수준비도 계획을 세워서 마른 음식 젖은 음식을 구분하여 명절 밑의 가격변동을 대비해야 하기때문이다. 

추석김치는 미리미리 담가두어야 안성맞춤으로 먹을 것이고 제기도 꺼내서 담을 준비를 해야 한다. 

남들은 실용적인 목기로 과감하게 잘도 바꾸어 쓰건만,

조상의 뜻을 받들어 유기그릇을 쓰는 나의 고집도 보통은 넘나보다.

그런데 마음은 이렇게 점점 바빠지는데 몸이 잘 따르지 않는다.

지난해가 다르고 올 가을이 다른 것 같다.

바로 이런 때에 부모님이 생각나는 것은 어떤 연유일까?

시어머님께서나 친정어머님 두 분 모두 그런 말씀을 하신 기억이 난다.

그늘 같고 울타리 같이 그냥 계셔주기만 해도 든든할 것 같은 아쉬움으로 공연히 달력만 넘긴다.

 

종가로 시집을 와서 사십 년 세월이 흘렀다. 

봉제사와 접빈객을 도리로 알고 살아가야하는 종가의 종부로 살아간다는 것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대봉사의 예를 받들어 모시고 준엄한 가풍을 따라 지켜지고 받들어야할 규범과 질서는 십 수대를 거쳐 이어온 전통이기에 감히 누가 그 오롯한 아름다움을 마다하리. 

제아무리 시대상황과 문화가 변천한다 해도 그 뿌리 깊은 가문의 역사를 어느 누가 함부로 할 수 있으랴.

 

첫 장을 보러 가면 제주와 북어포, 식혜를 만들 엿기름과 거피한 녹두를 우선으로,

다시마 김 등등 가볍고 보관이 가능한 마른 제수마련으로 시작하여 몇 행보를 오가야 하는지 모른다.

해가 갈수록 나이가 들수록 그 행보의 횟수가 늘어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인륜의 탓일까?

모든 것이 그 옛날과는 비교할 수 없도록 편리해지고 차례를 준비하는 과정 또한 쉽고 편안해졌지만, 그래도 주과포혜(酒果脯醯)를 기준으로 한 상차림의 질서는 결코 만만치 않다.

농경사회에서 자급자족하던 그 옛날 여인들의 삶을 생각하면 몇 행보의 불편을 쏟아내는 자체가 부끄러워 해야할 일이다.

추석의 대명사 같은 송편만 해도 이즈음은 떡집에서 모양도 색깔도 가지가지로 곱게 만든 완제품을 배달까지 해준다.

벼를 손수 거두어 찧고 까부르고 빻아서 그 신성하도록 하얀 쌀가루를 함지박 하나 가득 담고 앉은 여인을 무어라 표현해야할까?

온 몸의 정성으로 무릎 꿇고 앉아 하얀 쌀가루를 큰 덩어리로 뭉쳐 반죽하며 터득한 지혜와 공덕은 한가위 보름달처럼 둥글었으리라.

농사를 짓는 시골이 아니라도 대체로 송편은 집에서 만들어 차례 상에 올렸기에 아직도 그 추억들은, 때마다 새록새록 묻어나온다.

아침 일찍 방앗간에 가서 빻아온 쌀가루에 뜨거운 물을 부어 익반죽으로 주무르고 또 주물러 살갑게 만든다. 

매끄럽고 곱게 다져진 반죽을 조금씩 떼어내어 반달같이 고운 송편을 하나하나 만들어간다. 

시할머니 시어머니 시작은어머니 그리고 아가씨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이야기꽃을 피우고, 어린애들은 그 사이로 재잘대며 드나든다.

초록빛 솔잎을 깔아놓은 채반에 나란히 담겨지는 하얀 송편들.

더 고운 그림이 있을까?

부엌에서는 벌써 한솟금 김이 오르는 떡시루에서 솔잎향기가 그윽하다.

아침부터 시작한 송편 만들기가 해가 기울어도 끝이 없던 시절의 큰살림,

부엌에서 대청으로 대청에서 안마당 뒷마당으로 종종거리며 시중들던 녹의홍상의 초년시절이 부푼 가을의 달 속에 겹쳐진다.

뺑이네, 새삼이네, 길이네 그리고 연탄집에 세든 집까지 따끈따끈한 송편을 다 도르고 나면 밤이 이슥하였다.

골목길을 돌아서 대문으로 들어서다 잠깐 뒤돌아본 화안한 보름달,

그때에야 생각나는 친정은 멀지도 않건만….

그도 아주 잠시일 뿐,

내일 아침 차례 진설해야할 제수의 마무리가 더 막중한 나는 말 그대로 출가외인이다.

차례를 올리는 아침, 양념해둔 적을 굽고 어제 만들어둔 전을 데운다. 

탕을 담고 모든 음식을 대청으로 나른다. 

그곳은 어제 시아버님과 시숙부님 남편과 시동생들, 제관의 자리이다. 

좌포우혜, 어동육서로 시작하여 동두서미, 홍동백서, 조율이시의 질서를 맞추며 나누시는 말씀 중에는 노론 소론 사색당파까지 조용조용 들려준다. 

대대로 면면히 이어 나아가야할 뿌리 깊은 가문의 질서를 되풀이하며 가르치심이리라.

 

강신(降神)을 위해 모두 차례대로 선다. 

제주인 시아버님께서 앞에 나아가 꿇어 앉아 분향하고 우집사인 남편이 술을 따라 제주에게 드린다. 

그렇게 시작되는 차례가 철상(撤床)의 순서에 이르러야 여인들은 대청에 올라 모든 제수를 물려받고, 음복(飮福)을 위해 부산히 움직여한 한다.

다시 상차림을 하고 친척들이 돌아갈 때 들려줄 노느매기를 위해 순이 바쁘다.

 

바로 얼마 전까지 겪었던 일들이고 이제는 많이 간소화되었지만 아직도 하는 일이다. 

이 개명천지에 그 무슨 시대에 역행하는 폐습이라 할 사람도 있겠지만,

소중히 이어가고 싶고 이어나가야 할 일이다.

이제 시어른 두 분 다 안계시고 시숙부님마저 저세상 가시니 그 대를 이어감에 점점 어깨가 무거워진다.

뒤돌아보는 반생은 쭈그러드는 하현달 같아도 그래도 마음만은 이 가문 이 전통을 이어나갈 후손을 위해 튼튼한 다리가 되어 주리라.

다시 부푸는 한가위 보름달처럼 둥근 마음의 종부(宗婦)가 종손(宗孫)의 대를 잇고 또 다음, 다음의 대를 이어가도록 정성을 다하여….

 

 

반서갱동(飯西羹東) : 밥은 서쪽(왼쪽), 국은 동쪽(오른쪽)에 위치(산 사람의 상차림과 반대로 놓아야)

좌포우혜(左脯右醯) : 육포(肉脯) 왼쪽에식혜(食醯) 오른쪽에 차리는 격식.

어동육서(魚東肉西) : 생선은 동쪽에, 고기는 서쪽에 놓으며 적(炙)은 생선과 고기 중간에 놓는다.

동두서미 (東頭西尾) : 머리는 동쪽(오른쪽)으로, 꼬리는 서쪽(왼쪽).

홍동백서(紅東白西) : 붉은 과일(사과)은 동쪽, 흰 과일(배)은 서쪽에 놓는다.

조율이시(棗栗梨枾) : 왼쪽에서부터 대추, 밤, 배, 감의 순서

강신(降神) : 혼령을 모시기 위하여 향을 피우고 술을 잔에 따라 모사 위에 붓는제사의  절차

음복(飮福) : 제례를 마치면 참석자들은 제사음식을 함께 나누어 먹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