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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歲月은 지금/8 월 .

수필 - '여름 山' / 김윤희

아즈방 2024. 8. 6. 11:00

 

여름 산 / 김윤희

 

여름산은 언제부턴가 바늘로 찔러도 피 한 방울 나오지 않을 만큼 서슬이 퍼렇다.

더한 것도 덜 한 것도 없이 온통 한가지로 파랗다.

파랗다 못해 검푸르다.

겨우내 찬바람 속에서 가슴 시려하던 활엽수들이 응어리진 멍울을 풀어 저리 푸른 날을 세웠다.

사시사철 푸름을 간직한 소나무를 동경하던 활엽수들이 마침내 잎을 피워내고부터는, 옆도 뒤도 돌아보지 않는다.

비지땀을 흘리며 하루하루 눈에 보일 만큼씩 가지를 살찌우고,

녹(綠)잎을 숙성 시키고 있다.

햇빛도 덩달아 후끈 달아오른다.

그렇게 들끓는 열정으로 여름산은 우거져 간다.

하늘마저 가리고 저보다 키 작은 나무에겐 햇살 한 줌 나누어주질 않는다.

이파리들이 한 치의 양보도 없이 포개고 또 포개지며 영역을 넓히느라,

바람이 지나갈 여유조차 없다.

 

그렇게 숨 가쁘게 달려온 여름 산.

정작 그 산 속에 들면 숲은 보이질 않고 눅눅한 습기가 끈끈하게 달라붙어 몸을 옴츠러들게 한다.

한창 꿈을 향해 잎을 키울 때에는 진달래, 철쭉을 비롯해 아주 작은 꽃들까지 서로서로 햇살을 나누어 가졌다.

따사로운 햇살 머금어 고운 꽃을 피울 수 있도록 길을 비켜 도란도란 정도 나누었다.

겨울잠에서 깨어난 계곡 물은 콧노래를 부르며 이 골짝 저 골짝 이야기들을 끌어 모아 조잘조잘 전해 주었다.

그래서 늘 비밀도 없이 모두가 한 가족 한 통속이었다.

맑은 바람도 수시로 놀러와 머물고 사람들도 앞 다투어 산행에 몰려들었다.

사람과 산이 한마음으로 어우러지면 새들도 화음을 이뤄 정겨움을 더하곤 했었다.

미처 여물지 못한 여린 잎사귀조차 팔랑팔랑 산들바람을 일으켜 산을 찾는 사람들을 흐뭇하게 해주며, 그 행복감이 파르름히 윤기로 흘렀다.

울울창창한 꿈을 키우며 넉넉함으로 우뚝 서 있는 그곳은 늘 그렇게 오르고 싶은 대상이었다.

그러던 산이 여름이라는 이름을 달기 시작하면서부터는 서서히 비밀이 생기기 시작했다.

점점 자신의 속내를 감추면서 비밀을 들킬세라 짙푸른 잎으로 바리케이트를 치기 시작했다.

어느새 모두들 너무 커버려 경쟁자로 뒤엉켜 버린 것이다.

뻔뻔스러움으로 허리가 점점 굵어지는 나무는 모르는 채 한쪽 가지를 척 늘어뜨려 남의 영역까지 파고들며 딴청부리기를 예사로 한다.

남의 가지 위에 얼굴을 내밀고 올라서면 하늘 더 가까이서 더 많은 빛을 부릴 수 있음을 안 게다.

그래서 모두들 가슴속 음모를 음흉하게 감추고 서슬 퍼렇게 뒤엉켜 숨통 죄며 자신들의 뜻을 밀어붙이고 있다.

머지않아 끈적이며 눌러붙은 그 음습함이 몰고 올 비바람을 아무도 염두에 두지 않는 것이다.

 

한번 권좌를 맛본 사람은 이미 수렁으로 빠져들고 있음을 알아도,

허우적댈수록 더 깊이 빠져들 뿐 그곳을 벗어날 수 없다고 한다.

아니 어쩌면 벗어나려 하지 않는 것인지도 모른다.

욕심을 키운 나무들은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운명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인지 무모하게 버티고 서 있다.

어쩌면 피멍 들도록 두들겨 맞아 줄줄이 꺽이는 비참함이 자신만은 비껴가리라는 요행을 바라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저 뱃살 찌우는데 여념이 없다.

훅훅 숨을 막을 듯 적막 속에 후텁지근함이 진땀으로 배어 나온다.

‘과함은 모자람만 못하다 했던가.’

산을 좋아하는 내 남편도 이쯤 되면 산에 오르는 일을 포기한다.

이렇듯 온 산이 천지분간 없이 들끓어 오를 때는 열정을 눌러 자성시키듯,

하늘에서 장대비를 사정없이 내리붓는다.

때때로 태풍을 동반하기도 하고 때로는 온 산을 뒤엎을 듯 무섭게.

한여름이면, 어김없이 장대비가 쏟아지는 것은 그래서인가 보다.

이때 뿌리가 깊지도 못하면서 되잖게 뻣뻣하게 구는 몇몇은 여지없이 송두리째 뽑힌다.

또 몇몇은 가지가 꺾이거나 찢겨진 후에야 비로소 길을 터 준다.

한 번 성(盛)한 것은 얼마 못 가서 반드시 쇠(衰)하기 마련이라 하더니,

숲 속의 초목들은 그렇게 질서를 잡아가고 있나 보다.

언제나 푸르게 그 자리 지켜온 소나무는 그저 단순히 잎만 푸르게 지켜온 게 아니다.

소나무는 잎을 함부로 넓히지 않는다.

꿋꿋하게 흔들림 없이 소신을 지켜 가기에,

한결같은 모습으로 당당할 수 있는 것이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