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濟州道/漢拏山 .

[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 25] 사라진 아름드리나무들

아즈방 2023. 1. 7. 09:20

[강정효의 한라산이야기] 25.

사라진 아름드리나무들

그 많던 아름드리 나무, 어디로 갔나

 

▲ 제주시 도평동의 곰솔. 묘지 옆에 있기에 잘려나가지 않고 살아남았다.

# 큰 나무가 없는 이유
지난 21일은 유엔(UN)이 정한 '세계 산림의 날'이다.

유엔은 지난해 열린 제67차 총회를 통해 산림의 중요성에 대한 세계적 공감대 형성을 확산하기 위해

세계 산림의 날을 제정, 올해부터 적용되고 있다.

이보다 앞서 1992년 브라질 리우에서 '지구를 건강하게, 미래를 풍요롭게'라는 슬로우건 아래 개최된

지구 정상회담에서 리우선언을 발표하는데, 지속가능한 산림경영도 포함된다.

지속가능한 산림경영이란 산림의 생태적 건강성과 함께 산림자원을 장기적으로 유지하자는 것이다. 
 
우리나라의 경우 1949년 대통령령으로 4월 4일을 식목일로 지정하여 운영해 오고 있다.

식목일을 전후하여 1개월 동안을 국민식수기간으로 설정, 대대적으로 나무심기 행사를 벌이기도 했다.

하지만 요즘에는 지구온난화로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식목일을 3월로 옮겨야한다는 의견이 많이 나오는

실정이다.
 
식목일이야기가 나왔으니 한라산의 산림에 대해 얘기하고자 한다.

많은 이들이 한라산을 등산하고는 왜 한라산에는 아름드리나무가 없냐고 묻곤 한다.

그렇다면 과거에도 없었을까. 여기에서 전제가 하나 있다.

어디까지가 한라산인가 하는 문제로 지금의 경우 많은 이들이 국립공원구역으로부터 한라산이라

여기는데서 기인한다.

제주도 전체를 갖고 얘기해야 설명이 가능하다.
 
# 선박건조로 잘려나간 나무들
먼저 과거 한라산에 얼마나 많은 나무들이 있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는 기록을 살펴보자.

얼마나 잘려나갔는지를 보여주는 기록들이다.

먼저 고려시대의 일로 삼별초의 항쟁 이후 몽골은 일본정벌에 나서며 배를 건조하기 위해 한라산의

나무들을 대대적으로 잘라냈다.

이후 조선시대에도 선박건조와 건물의 신축을 위해 많은 나무를 잘라냈는데,

기록에 의하면 나무 벌채에 고역이 심하므로 세금을 면제해 주어야 한다는 이야기도 나온다.
 
먼저 고려시대의 기록을 보자.

한라산에서의 벌채와 관련된 기록은 맨 처음이 고려 문종 12년(1058)으로,

"왕이 탐라와 영암에서 목재를 베어 큰 배를 만들고 장차 송나라와 통상하고자 했다"고,

고려사와 고려사절요 등에서는 전한다.
 
당시 기록에는 이미 전년도 가을에 재목을 벌채한 후 바다를 건너 육지부의 사찰 창건에 사용됐다는

내용도 언급된다. 
 
이어 원종 9년(1268) 몽골이 고려에 보낸 조서에 보면 고려가 배 1000척을 지었다고 돼 있는데,

"만약 탐라가 조선역(造船役)에 참여하였으면 번거롭게 할 필요가 없지만, 만약 참여하지 않았다면

별도로 배 100척을 만들게 하라"고 지시한 부분이 나온다.

그리고 원종 15년(1274) 대선 300척을 전라와 탐라 두 곳에서 건조하라 하였는데,

그 전년에도 전함을 만들면서 백성들이 동원돼 농사를 제때 짓지 못한다는 내용도 있다.

충렬왕 6년(1280)에는 칙명으로 3,000척의 배를 만드는데 탐라에서 재목을 징발하여 공급하라고 지시

하기도 했다.

또 충렬왕 7년(1281)에는 칙명으로 탐라에서 배를 만드는 일을 홍다구에게 분부한 기록이,

충렬왕 9년(1283)에는 탐라에서 향장목(香樟木)을 구해 간 일이,

충렬왕 11년(1285)에 탐라에서 일본 정벌용으로 만든 배 100척을 고려에 주었다는 기록도 있다.

 

▲ 1990년대까지만 하더라도 한라산에서 표고재배를 위해 수많은 나무를 잘라냈다.

# 일제시대 무분별 벌목 자행
조선시대에는 어땠을까.

예종 원년(1469)의 기록에,

'이 산에서 생산되는 것은 안식향, 이년목, 비자, 산유자 등의 나무와 선박의 재료 같은 것인데,

 근래에 산 근처에 사는 무식한 무리들이 이득만을 좇아 다투어 나무를 베고 개간하여 밭을 만드니

 거의 헐벗었습니다. 지금부터 나무를 베고 새로 개간하는 것을 금하십시오'라는 대목이 나온다.

밭으로 일구기 위해 나무를 베고 불을 놓는 화전행위의 문제점을 지적한 것이다. 
 
그렇다면 한라산의 울창한 삼림은 언제까지 지속됐을까.

1905년 제주도를 방문, 10여일간 머물며 살핀 내용을 '조선의 보고 제주도안내'라는 책으로 엮은

아오야기 츠나타로오는,

'한라산의 남면에는 떡갈나무, 메밀잣밤나무 등의 노목대수(老木大樹)가 울창하여 대낮에도 어두운

 산림을 이룬다. 일반 도민이 사용하는 연료는 물론 공예자가 필요로 하는 빗, 뗏목 그 밖의 재료는

 모두 이 산림에서 벌채되며 그 수목은 거의 무진장이라 할 만큼 많다'고 소개하고 있다.

그리고는 당시 조선에 체류하던 일본인이 한라산삼림벌채권을 얻으려고 했으나 성사되지 않았다는

사례도 언급하고 있다.

1935년 여름 제주를 처음 찾은 후 같은 해 12월 적설기 한라산 등반에 나섰던 이즈미 세이이치도

한라산의 삼림에 대해 노인에게 전해들은 이야기를 전하고 있는데,

1900년경에는 상록활엽수가 해안선까지 뻗어 있었다고 한다.

산야의 식물대에 대해서는 화전, 목장을 위하여 근년에 소각이 이뤄져 많이 훼손됐음도 밝히고 있다.
 
한라산의 산림은 일제강점기 급속도로 훼손행위가 자행된다.

당시 일제는 제주에 영림서를 설치해 1915년부터 1930년까지 한라산의 원시림 수백만 본을 벌목 처분

한 것으로 나타나는데, 한라산 남북에 사업구를 설치, 일본인관료를 책임자로 둬 조직적으로 벌채했다.

북사업구의 경우 제1임반에서 제19임반으로,

남사업구에는 제1임반에서 제22임반으로 구분하고,

임반마다 40~50개의 소반으로 나눠 벌채에 나서게 된다. 
 
하지만 정작 한라산에서 가장 큰 훼손 원인으로 꼽히는 것은 바로 표고 재배장으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한라산에서의 표고재배는 1906년 이요(伊豫) 사람 후지타(?田寬二郞) 등이 동영사(東瀛社)를 조직해

처음 시작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오죽했으면 슈우게츠는 그의 책에서 "한라산 일대가 모두 표고 밭으로 바뀐 느낌"이라 적고 있다.

한라산에서의 벌채는 이후 1990년대까지 계속되며 막대한 삼림이 훼손되는 결과를 낳는다. 
 
# 남방애, 아름드리 나무의 상징 
이상의 기록이 한라산의 울창한 삼림에 대한 것이라면,

아름드리나무의 존재를 느낄 수 있는 부분은 남방애다.

남방애는 마무로 만든 방아를 이야기하는데 통나무를 잘라 커다란 홈을 파고,

그 가운데 돌확을 고정시켜 곡물을 도정하는 기구다.

제주민속자료 제5호로 지정된 제주대학교박물관 소장 남방애의 경우 그 규모가 직경 80∼150㎝,

높이 50∼70㎝에 이른다.

제작 시기는 조선시대다. 
 
남방애는 아름드리 통나무를 잘라내서 세로로 자른 후, 사발모양으로 만들고,

다시 밑바닥 가운데 둥그렇게 구멍을 내는 형태로,

재료는 굴무기라 불리는 느티나무, 사오기라 불리는 벚나무가 많이 이용됐다.

앞서 제주대학교박물관의 남방애를 보면 어느 정도의 나무가 필요한지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그만큼 거대한 나무들이 있었다는 얘기다.

특히 요섯콜방애라 불리는 거대한 규모의 남방애를 보면 제주에 큰 느티나무가 있었는지를 알 수 있다.
 
지금 농촌지역에 가면 노거수의 대부분이 팽나무인데,

이는 팽나무보다 더 질이 좋고 단단한 재목들이 많았기 때문에 잘려나가지 않은 것으로 보고 있다.

가구재나 건축재로 많이 애용됐던 나무는 곰솔을 비롯하여 산벚나무, 느티나무, 구실잣밤나무,

조록나무 등이다.

지난 2003년 6월 한라산 해발 700고지에 위치한 산세미오름 서쪽 자락에서 발견된 곰솔의 경우

밑동 둘레가 3m50㎝, 키 20m 규모의 아름드리나무인데, 사람들의 접근이 쉽지 않은 곳이기에 남은

것으로 추정된다.

어쨌거나 과거의 기록과 현재 남아있는 가구 등을 보면 과거 한라산 자락에는 울창한 삼림과 아름드리

나무들이 많았다는 사실을 느끼게 해 준다.

 

강정효 / 사진작가 / 제민일보 - 2013.03.2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