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17] 한라산으로 돌아간 산과 오름의 창조 여신
[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 17.
설문대 할망
한라산으로 돌아간 산과 오름의 창조 여신
여러 설화에 등장하며 도내 곳곳의 지명과 얽혀
구전 속 변형·확대…현대 창작물과는 구분해야
▲ 설문대할망이 빠져 죽었다는 물장올
#"흙 7번 던져 한라산 만들어"
며칠 전 제주도내 관광지 몇 군데를 둘러볼 기회가 있었다.
그 중 한곳에서 문화관광해설사가 설문대할망 설화에 대해 소개하는 이야기를 들었는데,
저런 이야기도 있었나 하고 깜작 놀랐다.
설문대할망의 출신성분을 이야기하며 옥황상제의 막내딸이라는 것이다.
해서 설문대할망과 관련된 이야기를 풀어볼까 한다.
설문대할망은 한라산과 수많은 오름, 즉 제주도를 만들어낸 창조의 여신이니,
어쩌면 맨 처음 소개했어야 하는데 그렇지 못한 미안함도 있고 해서.
설문대할망은 세명뒤할망, 쒜멩듸할망, 설명대할망, 설명두할망, 선문대할망 등의 이름으로도 전해진다.
그리고 그 내용은 모두들 알다시피 이렇다.
옛날 설문대할망이라는 거대한 여신이 살고 있었다.
이 할망은 힘이 얼마나 셌는지 삽으로 흙을 7번 파서 던지니 한라산이 만들어졌다고 한다.
제주도 곳곳에 산재한 오름들도 설문대할망이 치마에 흙을 담아 옮기는 과정에서 치마의 찢어진 틈으로
떨어진 흙덩어리가 만들어낸 것이라고 전해진다.
지금도 제주도 곳곳에는 설문대할망과 관련된 지명들이 많이 전해지는데,
예를 들면 성산일출봉에 있는 등경돌(燈擎石)이 그것이다.
일출봉 정상으로 오르는 계단 옆에 우뚝 솟은 바윗돌이 있다.
이는 설문대 할망이 바느질을 할 때 접싯불을 켰던 곳이라고 한다.
불을 켰던 곳이기 때문에 등경돌이라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설문대 할망은 처음에 다리를 만들다가 제주 사람들이 약속을 지킬 수 없게 된 것을 알고는 작업을
멈추었다.
지금도 남아 있는 당시의 흔적이 조천읍 조천리와 신촌리 사이의 바다로 향한 바위들이라고 말한다.
제주 사람들이 그려낸 설문대할망의 최후 또한 매우 신비롭다.
아이러니하게도 설문대 할망은 자신이 만들어낸 한라산으로 영원히 돌아간 것이다.
하루는 설문대 할망이 제주도의 물의 깊이를 재보려고 제주시 앞 바다의 용두암 근처에 있는 용연에
들어섰는데, 물이 무릎까지밖에 차지 않았다.
더 깊은 곳을 찾아 마침내 한라산 중턱의 물장올에 들어갔다가 너무 깊어 그만 빠져 죽는다.
그래서 지금도 제주 사람들은 물장올을 가리켜 '창 터진 물'이라 하여 바닥끝이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 지역마다 특정 지형과 관련한 이야기가 약간씩 더해지는 양상을 보인다.
예를 들면, 소섬과 다랑쉬오름, 섶섬, 산방산, 굿상망오름, 조천 바닷가의 엉장매코지, 곽지리의
솥덕바위, 홍리물, 관탈섬 등이다.
그 내용을 보면 키가 얼마나 컸느냐 하면 빨래를 할 때 한 발은 가파도, 다른 한 발은 일출봉에
디디었다하거나, 솥을 얹었던 바위, 대죽범벅을 먹고 대변을 보았는데 굿상망오름이 되었다,
오줌 줄기 때문에 떨어져 나간 게 소섬이 되었다,
흙이 너무 많아 주먹으로 봉우리를 친 곳이 다랑쉬오름,
빨랫방망이로 삼 한쪽을 때리니 굴러가 산방산이 되었다,
할머니가 쓰던 감투가 오라동 한천변의 바위다,
일출봉의 등경돌은 길쌈을 할 때 솔불을 켰던 등잔이라는 이야기 등등이다.
#1771년 최초 기록 등장
그렇다면 설문대할망 이야기는 언제부터 전해졌을까.
기록상으로는 한양으로 과거시험을 보러 가다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게 된 애월 출신 장한철이 처음이다.
장한철은 1771년 1월 5일자 기록에서 배가 풍랑을 만나 표류하다가 제주도 근처를 지나는 상황을 설명
하고 있다.
멀리 한라산이 보이자 모두들 울면서 한라산을 향해 기도하는데,
그 대상으로 백록선자(白鹿仙子)와 선마선파(詵麻仙婆)이 등장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하여 장한철은 탐라에서 전하는 이야기를 소개하고 있는데,
선옹(仙翁)이 하얀 사슴을 타고 한라산 위에서 노닐었다는 내용과,
아득한 옛날 선마고(詵麻姑)가 걸어서 서해를 건너와서 한라산에서 노닐었다는 전설이다.
이어 1841년 이원조목사의 탐라지초본에는 사만두고(沙曼頭姑),
1932년 김두봉은 신녀(神女)의 이름으로 설만두할망이라 표기한 후 한자로는 사마고파(沙麻姑婆),
해방 직후 담수계 편의 증보 탐라지에서는 설만두고(雪曼頭姑) 등의 이름으로 등장한다.
설문대할망 이야기는 이밖에 1937년 제주도를 조사한 이즈미 세이이치의 제주도민속지에도 등장한다.
구전으로 전하던 이야기가 문자로 기록되며 그 이름이 달라지는 것이다.
요즘 관광지 이정표를 보면 중국어 표기를 많이 볼 수 있는데,
우리 본래의 이름이 어떻게 달라지는가를 느끼게 되는 것과 같은 현상이다.
한자어 표기를 볼 때 육지부 곳곳에 전하는 마고할미 전설을 생각하며 붙여진 표기라 여겨진다.
여기서 마고(麻姑)라는 이름이 아닌 선마고(詵麻姑)라 표기한 이유에 대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이에 대해 전경수교수는 선마(詵麻)가 기본이라 전제한 후,
선마고(詵麻姑)에서 선(詵)과 마고(麻姑)를 분리하여 마고할미 계열 전설로 풀어보려는 시도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볼 여지가 있다고 지적한다.
다른 마고할미 계열 전설들과의 총체적인 비교분석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최근 학자들 사이에서 설문대할망은 마고도, 선마선파도 아닌 제주의 설문대할망으로 인식해야 한다는
주장과 맥을 같이한다.
▲ 영실의 오백장군
#'오백장군 전설과 별개' 해석도
한라산의 거대한 할망과 관련된 전설로 영실의 오백장군 이야기가 있다.
예전에 한라산에 한 어머니가 오백명이나 되는 자식을 거느리고 살고 있었다.
식구는 많은데다 흉년이 들어 끼니를 이어가기가 힘이 들자 아들들에게 양식을 구해오라 시키고는,
자식들이 돌아와 먹을 죽을 끊이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죽이 솥에 눌러 붙지 않도록 저어주다가 그만 빠져 죽고 말았다.
그런 줄도 모르고 오백형제는 돌아와 죽을 맛있게 먹었다.
마지막으로 막내 동생이 죽을 뜨는데 사람 뼈다귀가 발견되자 어머니가 빠져 죽은 것임을 알고,
어머니의 고기를 먹은 형들과 같이 있을 수 없다가 차귀도로 달려가 울다가 바위가 됐다.
뒤늦게 이 사실을 안 나머지 형제들도 울다가 굳어져 바위가 되니 영실의 오백장군이라는 내용이다.
하지만 여러 학자들은 설문대할망과 영실의 오백장군 전설은 처음에는 별개였던 것으로 해석한다.
설문대할망과 같은 거구가 솥에 빠져 죽었다는 것 보다는 창터진 물에 빠져 죽었다는 게 더 걸맞다는
것이다.
1964년 펴낸 제주도지에서 임동권교수의 글이나 현용준교수가 1976년 펴낸 '제주도 전설'에 나타나듯
두 이야기가 별개로 전해지는 것 또한 오백장군의 어머니와 설문대할망은 다르다는 얘기다.
그런데 자식을 오백명이나 둘 정도의 어머니라면, 설문대할망 정도는 돼야 하지 않느냐는 측면에서
후대에 결합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 오백장군 전설과 설문대할망을 결부시키려는 경향은 최근 들어 부쩍 늘어났는데,
필자가 판단하기로는 제주돌문화공원의 조성과 무관하지 않다.
돌문화공원의 각종 자료들을 보면 김영돈교수의 1993년 펴낸 '제주민의 삶과 문화'의 글을 인용,
설문대할망 전설과 오백장군 전설을 동일하게 설명하는 경향이 강하다.
물론 이전의 기록으로 시인 고은이 1976년 펴낸 '제주도, 그 전체상의 발견'이라는 수필집에서도
설문대할망을 소개하며 오백장군의 어머니라 명시한 경우도 없지는 않다.
▲ 제주돌문화공원에서 열린 설문대할망제
#설화-창작 경계 고민 필요
전설은 지역에 따라, 그리고 구술자에 따라 약간의 가감이 있게 마련이다.
설문대할망 전설 또한 예외가 아니다.
한라산을 만들었다는 이야기나 표해록에서 장한철이 기도의 대상으로 삼은 사실을 볼 때,
처음에는 신(神)으로 숭배되다가 나중에 결혼이야기, 오백 아들이야기, 심지어는 옥황상제의 딸로
하늘과 땅을 나누어 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죄명으로 귀양을 왔다는 얘기로까지 확장된 것으로 풀이된다.
설문대할망이 옥황상제의 딸이라는 얘기는 인터넷에서는 많이 유포돼 있지만,
과거의 기록에서 그 사례를 찾기는 쉽지 않다.
주로 2000년 이후의 일이라 여겨지는데, 장영주의 동화집이나 김문의 장편소설 등 작가의 창작물이
설화가 섞이며 설화보다 창작물의 내용이 더 부각된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볼 따름이다.
차제에 관광객을 대상으로 관광해설사들이 어느 선까지 이야기를 들려주어야 할까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아무리 구술자에 의해 변형이 있을 수 있는 게 전설이라지만,
보편적인 관광객들이 문학기행을 온 사람은 아니지 않은가.
* 강정효 / 사진작가 / 2012.11.26 - 제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