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15] 세계 유일의 구상나무 숲
[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15]
세계 유일의 구상나무 숲
'살아 천년 죽어 백년' 구상나무의 품 너른 고향
▲ 한국 특산식물인 구상나무가 한라산 해발고도 1200m에서부터 1800m까지,
603ha의 넓은 면적에 걸쳐 순림을 이루고 있다.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특산식물'
얼마 전 답사팀과 함께 한라산 윗세오름을 찾은 적이 있다.
일행과 이야기를 나누다 깜짝 놀란 게 있다.
구상나무와 주목을 구분하지 못하는 것이었다.
여기에 비자나무까지 더해진다면 더더욱 헷갈릴 것이다.
구상나무와 주목, 비자나무 등은 같은 나자식물(겉씨식물)이다.
흔히 침엽수라 불리는 구과식물은 잎이 대부분이 바늘모양을 하고 있다.
간혹 부채꼴, 깃처럼 생긴 소철 등도 있지만.
같은 나자식물문이지만 구상나무는 구과식물강의 소나무과이고, 주목과 비자나무는 주목강 주목과이다.
구상나무는 주목, 비자나무와는 달리 우리나라에만 자라는 한국특산식물이다.
학명이 아비스 코리아나(Abies koreana)인 구상나무는 한자명으로 濟州白檜(제주백회),
일본명으로 한국전나무, 제주전나무를 의미하는 등 제주와는 각별한 의미가 있는 나무다.
심지어 그 이름을 구상이라 한 것도 제주어의 '쿠살'에서 비롯된 것이라 전해진다.
쿠살이란 성게를 이르는 말로, 구상나무의 잎이 성게의 가시와 비슷하기 때문에 불리게 됐다는 것이다.
구상나무가 세상에 처음 알려진 것은 1907년이다.
당시 식물학자인 포리신부와 서귀포에서 포교활동을 하던 타케신부가 한라산에서 채집한 것이다.
당시 채집된 표본들을 여러 학자들에게 제공돼 제주도 식물 연구의 기초가 된다.
이어 일본의 학자 나카이가 1913년 한라산에서 채집해 제주도식물조사보고서 등에 분비나무로 기재한다.
구상나무와 분비나무가 워낙 비슷해 같은 종으로 봤던 것이다.
소나무과의 전나무속에는 구상나무와 분비나무, 전나무가 있다.
전나무는 쉽게 구분이 되지만 분비나무와는 식별이 쉽지 않다.
때문에 이후에도 구상나무를 분비나무의 지리적 변종, 구상나무와 분비나무의 잡종현상, 유전자교합,
공통조상이라는 등의 주장을 담은 연구결과물들이 발표되기도 한다.
이와 관련 한라산연구소가 조사한 자료에 의하면 구상나무는 나무의 형태가 넓은 피라미드형인 반면,
분비나무는 좁은 피라미드형이라는 차이가 있다.
열매의 경우도 구상나무는 난형으로 끝이 둔하지만,
분비나무는 원통형으로 끝이 다소 뾰족한 형태라는 것이다.
한라산의 구상나무는 솔방울의 색깔에 따라 구분하여 부르기도 하는데,
구상나무와 푸른구상나무, 붉은구상나무, 검은구상나무 등이다.
윌슨의 서양전파 약탈논란 불러
구상나무가 분비나무와 다른 종임을 처음으로 밝혀내고 이를 명명한 학자는 윌슨이다.
미국 하버드대학 아놀드수목원의 한국산 식물조사에 참여한 윌슨은,
1917년 제주도에서 구상나무를 채집한 후 분비나무와는 다른 종임을 밝혀내고,
그 결과를 아놀드수목원 연구보고서에 발표한 것이다.
당시 한라산에서 윌슨이 채집한 구상나무 표본은 2점으로 그때 채집한 종자에서 발아한 구상나무가
현재 수목원에 전시되고 있다.
구상나무가 서양으로 퍼져나가기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이다.
식물사냥꾼이라는 별명까지 가졌던 윌슨이 한라산에서 구상나무를 사냥해 간 것이다.
때문에 윌슨에 대해 우리나라의 식물의 가치를 전세계에 알린 업적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소중한 자원을
수탈해갔다는 부정적인 평가도 함께 뒤따른다.
어쨌거나 윌슨에 의해 서양으로 넘어간 구상나무는 미국과 유럽 등지에서 정원수로, 크리스마스트리로
각광을 받으며 품종개량이 이뤄진다.
아놀드수목원에서 자라는 구상나무는 그 키가 20m에 달할 정도로 한라산에서 자라는 구상나무와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다.
요즘 나라마다 종(種)의 전쟁이라 하여 종 다양성 보존과 종자개량사업에 심혈을 기울이는 것과 무관
하지 않다.
1994년 IUCN 절멸위기종 지정
현재 구상나무는 한라산을 비롯하여 덕유산, 무등산, 지리산 등지에서 자라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라산의 구상나무가 주목받는 이유가 있다.
세계 최대 규모의 순림, 즉 숲을 형성하고 있다는 말이다.
다른 지역은 분비나무, 주목, 사스레나무 등과 같이 자라기 때문에 숲을 이룬 순림은 한라산이 유일하다.
특히나 구상나무는 전나무속 식물들 중에서는 세계에서 유일하게 남쪽지방에 분포중심지가 있고,
북쪽으로 갈수록 분포가 적어지는 특징을 띠고 있다는 것이다.
이 말은 구상나무의 분포지역을 볼 때 한라산이 중심지이고 북쪽, 즉 육지부의 덕유산 무등산 등으로
갈수록 그 개체수가 적어진다는 얘기다.
한라산에서의 구상나무는 지역에 따라 해발 1200m에서부터 드물게 나타나고,
숲은 1300m부터 나타난다.
전체 면적은 603ha에 걸쳐 분포하고 있는데,
고도별로는 해발 1600m-1700m가 전체의 42%로 가장 많고,
이어 1500m-1600m 30%, 1700m-1800m 14% 등의 순이다.
이렇게 볼 때 1500m-1800m가 전체의 86%인 526.9ha를 차지한다.
지역별로는 동쪽사면에서 북쪽사면, 즉 성판악코스에서부터 관음사코스에 이르는 구간에 넓은 면적의
순림을 이루고 있다.
한라산에 구상나무가 자라는 것과 관련하여 대부분의 고산식물이 그렇듯이 빙하기 동북아시아에서
한반도를 거쳐 제주도로 유입된 것으로 보고 있다.
구상나무 외에 백록담에서 자라는 돌매화나무와 시로미 등이 해당한다.
이후 후빙기를 거치며 기온이 상승함에 따라 기후와 척박한 토질 등의 환경에 적응하며 피난처로
고산 및 아고산지대에 해당하는 한라산의 정상부에서 격리된 채 자라게 됐다는 것이다.
결국 기후의 영향과 더불어 섬으로 고립됐기 때문에 오늘날과 같은 구상나무 순림을 형성하게 됐다는
것인데, 반대로 기후의 영향으로 한라산의 구상나무는 앞으로 100년 이내, 즉 금세기 안에 멸종할 지도
모른다는 우려의 목소리도 나온다.
최근의 지구온난화가 그 원인이다.
지구온난화가 지속될 경우 한라산의 고산식물들 상당수가 고사하거나 극히 일부만이 정상부로 이동,
멸종위기에 처하게 된다는 얘기다.
얼마 전 제주에서 총회를 열기도 했던 세계자연보전연맹(IUCN)에서는 이미 1994년에 구상나무를
절멸위기종으로 지정한 상태다.
▲ 여름 제주바다에서 자리돔을 잡던 '자리테우의 옛모습'
예로부터 우리의 조상들은 구상나무를 이용해 테우를 만들었다.
테우는 통나무 10여개를 엮어서 만드는 가장 원시적인 배로, 자리돔을 잡을 때 주로 이용한다.
예전에는 한라산의 구상나무를 잘라다 만들었는데,
일제강점기에 이를 금지시키자 숙대낭(삼나무)로 대체했다고 전해진다.
구상나무의 경우 한라산까지 가서 잘라낸 후 소나 말을 이용해 바닷가까지 끌어와야 하는 수고로움이
따르지만 삼나무와는 달리 물에 잘 뜨고 잘 썩지도 않아 최고의 재료로 인정받았다.
송진이 많기 때문인데 자리 석 섬(약 500리터 규모)을 실어도 거뜬했다고 전해진다.
한라산 등산로를 걷다 보면 수많은 구상나무 고사목을 보게 된다.
흔히들 '살아 천년 죽어 백년'이라는 말로 구상나무 고사목의 아름다움을 표현하고 있는데,
겨울철 눈꽃으로 치장한 구상나무 고사목은 절경이다.
실제 구상나무의 수명과 관련해서는 120년이라는 견해와,
이보다 짧은 60-70년에 불과하다는 또 다른 연구보고가 있다.
어쨌거나 죽은 후에도 사랑을 받는다는 게 그리 쉬운 일이 아니기에 한편으로는 경외감마저 든다.
글 : 강정효 / 사진작가 / 2012년 10월 29일 <제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