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7] 한라산철쭉제 변천사
[강정효의 한라산 이야기-7]
한라산철쭉제 변천사
가슴까지 붉게 타오르는 자연의 예술작품
‘혼자 보기 아까운’ 색채의 향연, 철쭉제로 시민과 공유
열풍 뒤엔 자연훼손 역기능도¨“아쉽지만 욕심은 금물”
1967년 시작, 수많은 화제 낳아
◀ 철쭉꽃 만발한 한라산 만세동산
1967년 5월 21일 폭우가 쏟아지는 한라산 성판악. 100여명의 산악인들이 산행을 준비하고 있다.
이들은 제주시에서 오전 6시 버스로 출발하여 성판악, 사라악으로 정상에 올라가서 철쭉제를 지내고,
개미등, 산천단으로 하산할 예정이다.
그러나 행사당일 버스로 성판악까지 갔으나 폭우로 인해 등반할 수 없어 코스를 변경하여 물장올,
태역장올, 골프장, 제주시로 하산해야 했다.
한라산에서의 첫 번째 철쭉제는 이렇게 미미하게 시작됐다.
당시 회비는 200원, 참가자들에게는 주최 측인 제주산악회에서 관광버스를 제공했다.
이와 관련하여 당시 행사를 주최했던 제주산악회 회원들은 한라산신에게 제례를 올리는데 있어,
한라산신에게 미리 고하지도 않고 백록담에 감히 제단을 꾸리려 해서 한라산신이 노한 것으로 여겼다.
해서 당시 안흥찬 당시 회장은 제문을 낭독함에 있어 먼저 한라산신에게 죄송하다는 사죄의 인사를
먼저 고했다고 한다.
이후부터 한라산신의 보살핌으로 산악행사를 진행함에 있어서는 매번 날씨가 흐리다가도 호전됐다고
제주도의 산악인들은 여긴다.
심지어 날씨문제로 결국은 폐지된 한라산 눈꽃축제의 경우에도 눈꽃축제 기간에는 기상이 악화돼 행사를
제대로 진행하지 못한 반면, 같은 기간 산악인들의 행사인 한라산만설제가 열릴 시점이 되면 눈이 알맞게
내려줘 행사를 빛낼 수 있었다는 얘기마저 회자된다.
처음 한라산철쭉제는 당시 제주 유일의 산악회인 제주산악회 회원들이 한라산의 이 아름다운 비경을
자신들만 보기에는 너무 아깝다며 시민과 관광객들에게 보여줄 기회를 만들자는 의도로 기획됐다.
당초 철쭉제는 1966년에 기획된 것으로 전해진다.
1968년의 신문기사에 의하면 1966년부터 연2회나 우천관계로 이뤄지지 못하다가,
3회인 1968년에 절정을 이뤘다는 기록까지 보인다.
1968년 철쭉제의 경우도 대한일보 기사에서 1회로 표기한 반면 다른 제주신문과 제남신문에서는 2회로
표기해 논란이 되는 부분이다.
이와 관련하여 제주산악회의 기록에 보면 첫 번째의 철쭉제는 67년 처음 열렸음을 확인할 수 있다.
한라산철쭉에 개최에 맞춰 새롭게 등산로가 개설되기도 한다.
1회 철쭉제 당시 방송국에 근무하던 제주적십자산악안전대의 김종철 대장이 방송으로 중계하겠다고
나선 것이다.
이때 방송장비 일체를 백록담까지 운반하기 위해 가까운 등산코스가 개척되는데 성판악코스다.
지금 등산객들이 백록담을 오를 때 즐겨 이용하는 성판악코스는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다.
제2회 행사는 1968년 5월 26일 한라산 정상에서 열렸다.
철쭉제에 앞서 이를 소개하는 신문기사를 보면 행사장에서 철쭉꽃잎으로 만든 떡과 철쭉꽃이 담긴 술을
참가자들에게 나눠준다는 부분이 눈길을 끌기도 했다.
행사일정은 오전 6시 제주시를 출발하여 성판악 코스로 정상에 올라가서 철쭉제를 지내고,
서북벽, 장구목, 용진각, 개미등, 탐라계곡, 산천단으로 하산했다.
참가자는 시민 70여명과 서울 요산산악회장(회장 한순용), 308경보대대 장병, 관광객, 한국일보 사진기자,
제주산악회 안흥찬 회장과 회원 16명이 참석했다.
회비는 500원이었다.
이날 처음 추첨을 통해 선발한 철쭉여왕에는 도립병원에 근무하는 장보순 양이 뽑히는데,
철쭉 여왕은 요산산악회에서 그해 가을 강화도 마니산 추계 산제에 초청되기도 했다.
요즘의 감귤아가씨 선발대회보다 철쭉아가씨가 먼저 선발됐었다는 얘기다.
▲ 철쭉아가씨들과 원로산악인 안흥찬 소장
제3회 대회는 1969년 5월 18일 서울의 용산산악회와 대한산악회의 산악인 10여명, 경기대학과 중앙대학,
충주여대 등 200여명이 참가한 가운데 백록담에서 진행된다.
제주산악회의 월례등반 보고서에 의하면 날씨가 좋지 않아 충분한 철쭉제를 지내지 못하고 돌아와 아쉽다는
내용이 눈길을 끈다.
이때는 서울에서 대한산악연맹과 요산산악회, 동아방송 기자까지 참가했고,
시민들의 경우 100명을 선착순으로 신청 받아 참여케 했다.
회비는 500원이었는데, 참가자들에게는 기념배지와 왕복차량이 제공됐다.
이어 4회 대회는 윗세오름에서 열렸다.
▲ 백록담에서 열린 철쭉제에서의 제문낭독
한라산 철쭉제는 1969년 5월 제3회 행사까지 제주산악회에서 행사를 주최하고,
1969년 6월 제주도 산악연맹이 만들어진 후,
1970년 제4회부터는 제주도산악연맹에서 주최하기 시작하여 현재까지 이어지고 있다.
철쭉제는 일반시민들이 점차 많이 참석해가고, 철쭉여왕을 뽑는가 하면,
한라산 정상에서 결혼식을 올리는 등 행사가 다양해짐에 따라 방송국에서는 라디오와 TV로 중계방송
까지 하기도 했다. 심지어 1972∼75년 무렵에는 6만여 인파가 몰릴 정도로 인기를 끌었다.
1973년 제7회 한라산철쭉제 때는 한라산 정상에서 결혼식을 올려 화제가 되기도 했다.
주인공은 서귀포에 사는 장모(27)군과 박모(23)양으로 지난 철쭉제때 백록담에서 우연히 만난 것이
인연이 되어 1년을 사귀어 오다가 이날 산상제가 끝난 뒤 결혼식을 올린 것이다.
예복은 등산복차림이었고, 신랑의 가슴에 에델바이스(한라솜다리) 세 송이를, 신부의 가슴엔 철쭉꽃
세 송이를 꽂았다.
결혼식이 끝난 뒤 참석자들은 산사나이와 산아가씨의 노래를 합창하여 이들을 축복해줬다.
주례는 제주도산악연맹 명예회장인 홍병철(국회의원) 씨였다.
환경훼손 논란 속 형식 간소화돼
점차 참가자가 많아지면서 산악안전과 자연훼손 문제가 대두돼어,
한라산철쭉제는 77년 11회 대회를 백록담 분화구에서 지낸 것을 끝으로 왕관능이나 선작지왓에서
산악인들만 조용히 모여 해 뜨는 시간에 철쭉제를 지내게 된다.
관광객 유치와 자연환경 보전이라는 서로 상충되는 현상이 나타난 것이다.
한라산철쭉제에 대한 평가는 한라산의 경관을 공개적으로 알렸다는 순기능과 함께 수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백록담 분화구 안에 운집, 훼손을 가속화했다는 역기능도 상존한다.
▲ 한라산 선작지왓에 털진달래 무리가 만개하여 장관을 이루고 있다.
훗날 철쭉제가 한라산 훼손의 주범처럼 비춰지기도 했다.
실제로 1990년대 중반 제주도청에서 한라산 훼손의 문제를 제기하며 한라산케이블카의 필요성을 역설
하는데 이 때 등장하는 사진이 백록담 분화구 안에서의 철쭉제 행사에 운집한 등산객들의 모습이었다.
여기서 간과하는 문제는 70년대 초반 수만명이 철쭉제에 참여할 당시,
제주도청에서는 철쭉제에 공무원들을 동원시키기도 했다는 것이다.
시군 공무원 및 실과별로 할당구역을 지정하고, 출장비까지 지급하면서 말이다.
훗날의 평가에 대해 철쭉제 자체, 그리고 이를 주관하고 있는 산악인들에게 있어서는 다소 억울한 면도
없지 않을 것이다. 과거의 현상을 현재의 시각으로 판단한다는 문제이다.
한때 자연훼손 문제를 이야기하며 산을 사랑하는 사람은 산을 찾지 않는다는 말이 유행했었다.
조금이라도 탐방객의 숫자를 줄여 훼손을 최소화하자는 얘기와 함께. 비슷한 이유로 한라산철쭉제는
산악인들만의 행사로 치러지게 된다.
이렇게 한라산철쭉제는 일반시민들의 뇌리에서 잊혀져갔다.
이 과정에서 1990년 7월 한라산에서의 취사행위가 금지되는 한편,
철쭉제 등 각종 산악행사에 대해 개최장소 변경과 행사를 간소하게 치르도록 유도하기도 했다.
이후 등반객들의 자연보호에 대한 의지가 좋아지는 등 인식이 바뀜에 따라,
1996년부터 공개된 장소인 윗세오름 앞 광장에서 열리게 된다.
이는 1997년 한라산 눈꽃축제가 열리며 한라산의 자원을 관광상품화하자는 사회분위기와도 맥을 같이
하고 있다.
그리고는 2002년에 한국, 그리고 이곳 제주도 서귀포에서 열리는 월드컵의 성공을 기원하는 의식을
철쭉제와 병행해 백록담에서 거행한다.
백록담을 벗어난 지 25년 만에 다시 백록담에서 철쭉제가 열린 것이다.
한 번에 그쳤지만.
지금 한라산에서는 등산로 이외의 모든 곳이 통제구역이다.
이에 맞추어 한라산철쭉제도 윗세오름의 광장에서 열린다.
비록 주변에 만발한 철쭉꽃이 없어 아쉽지만 산악인들은 욕심 부리지 않는다.
한라산 서북벽과 남벽 등산로가 훼손돼 예전 모습을 찾을 수 없다는 사실을, 자연이 주는 교훈을 알기
때문이다.
*글 강정효 사진작가 2012년 6월 25일 <제민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