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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마 (감저-甘藷)' / 정공철

아즈방 2022. 4. 16. 10:00

 

고구마 / 정공철

 

고구마, 우리 시골에서는 감저라 부른다.
조선 영조시대에 조엄이라는 일본 통신사가 대마도에서 종자를 얻어다,

재배 풍토에 맞는 제주도에서 시험재배한 것이 고구마 농사의 그 始原이라고 한다.

한자로는 甘藷(감저)또는 조엄의 성을 따서 趙藷(조저)라고도 했던 모양이다.
하여튼 내가 세상에 태어나서부터 고구마를 감저라 불렀고,

아직도 노인들은 그렇게 알고 있다.

 

우리 시골에는 감저가 무지하게 많았다.

때로는 밥으로 먹고 떡으로도 만들고 술도 되고, 소나 말 돼지도 감저로 키웠다.

이른 봄 묘종으로 심겨진 감저는 봄비를 맞고 줄기가 쪼빗쪼빗 고개를 내밀면

사람들은 바빠진다.
겨우내 움막에서 하품하던 황소도 기지개를 켜고 종달새가 하늘 높이 지지 배배

재촉하면 사람들은 들판으로 모인다.
아이도 나서고 할머니도 가야 한다.

아기도 이랑에서 젖을 먹고 송아지도 밭에서 어미젖을 빤다.
웃드르 산간마을에 감저 소리가나면 학교에선 종도 울릴 수 없다.
아버지는 담배 피울겨를 없이 소 끄는 쟁기와 씨름하고,

온 식구가  이랑에다 감저 줄기를 들입다 쑤셔 넣느라 허리 펼 시간이 없다.
아이는 이랑에 감저줄기를 바쁘게 흘리며 하늘의 해를 원망해 보지만 하루 해는

길기만 하다.
시커먼 얼굴, 범벅된 손과발, 허기진 뱃속이 야단이다.

어둑어둑 사람들은 울담사이를 기어 든다

흐릿한 호얏불이 환하게 나를 반긴다
줄기에 신맛 단맛 다뺏긴 지리도 못생긴 구감(모종감저)으로 배를 채우고 잠을

청한다.

 

흙 깊이 심겨진 줄기는 한여름 긴 가뭄에도 밭 이랑이 고랑을 메우는 홍수를 견뎌

내며, 실한 알들을 흙속에 품고 온통 푸르름으로 넓은 밭을 덮는다.

저 멀리 동녘 하늘에서 붉은 숯덩이를 토해 내는 듯 둥근 태양이 기어 오를 때면,

아이는 무거운 눈꺼풀을 비비며 취한 잠에서 떠밀려 일어 서야만 한다.

어느새 10여리 목장에서 소를 몰고 오신 아버지는 밭갈이 채비에 분주하고,

어머니와 누나는 무쇠솥에 검질불로 화급히 삶아내어 뜸 덜 든 보리밥을 커다란

밥채롱에 퍼 담느라 바쁘다.

한 낮 뜨거운 태양보다 이슬맺힌 아침이 작업 능률이 더 있음을 어른들은 스스로

알고 있기에, 모두가 서둘러 감저밭으로 향한다.

구덕 안에 누워 잠든 애기는 누나가,

대 식구의 점심 구덕은 어머니가 등짐으로 지고,

지실(地實-감자) 볶아 가득담긴 주전자 손에 들고, 천근 무거운 걸음으로 따라 나선

아이는 죽을 맛이다.

울퉁불퉁 자갈길 잡초 위엔 아침의 기운을 먹고 동글동글 맺힌 이슬 방울은 따가운

아침 햇살에 보석처럼 영롱하지만,

아이의 검은 타이어 고무신을 흥건히 적셔 걸음에 불편을 줄 뿐이다.

저 멀리 우뚝 선 한라산은 아이의 미래를 안다는 듯 정겹다 손짓을 한다.

한라산이 오름줄기 타고 내를 건너 바다로 줄기차게 내려서다 쉬어가는 우리 마을

이다.

오름과 동산을 가르며 바람막이 나무심고 엉기성기 돌담 쌓아 많은밭을 만든 넓은

땅이다.

밭 이랑에 줄기를 쑤셔 넣은지 한 달여에 불과한데,

긴 장마에 단물 마시며 어느새 줄기끝 싹들이 힘차게 밭 고랑까지 덮고 있다.

감저는 흙속의 양분을 먹고 자라며 한여름 가뭄보다 오히려 질기디 질긴 잡초가

더 천적이다.

그러므로 알찬 가을겆이를 위해선 한 여름 두 세 차례 검질매는 일은 피할 수 없는

중요한 작업이다. 

헤아릴 수 없는 이랑에 가득한 감저 줄기들,

아득히 멀리보이는 저 쪽 끝 돌담 멍애..

아이는 한 숨이 절로 나온다.

그러나 어른들은 가을을 생각하며 더위를 잊는다. 

아버지 손에 쥔 밧줄 채찍이 무서워 힘겹게 쟁기 끄는 암소 녀석은,

맛있는 감저줄기 향기에 취해 연신 혓바닥을 내밀어 보지만,

주둥이에 씌워진 새끼줄 그물망이 원망스러워 부릅떠 껌벅이는 두 눈이 애처롭다.

녀석은 밭고랑 살짝 갈아 재끼는 것 보다 맛스런 먹이를 먹을 수 없음이 더 큰

고통인 모양이다.

밭 담 주변엔 모쿠실나무, 폭나무에서 왕매미 퐅매미 소리가 어우러져 요란스럽고, 

담벼락의 여치는 입에서 궂은액 토해내며 짝짓기에 열을 올리며 숨이 차 아랫배

실룩이는 모양이 가관이다.

줄 줄 흐르는 땀, 온 몸에 수 없이 돋아나는 붉은 깨알 땀띠가 따갑다.

아버지 등에서 흐르는 땀이 갈적삼을 흥건히 적시지만,

몸에 붙지않은 갈 옷은 참 좋은 옷이다.

밀짚을 손으로 엮어 미싱으로 잘 박음질 한 누나의 밀낭 패랭이가,

한 낮 뜨거운 태양빛을 가려 줘 한결 시원하다.

어디서 흘러 왔는지 뭉개구름 한 조각이 태양앞을 지날 때면 잠시 시원함에 모두가

하늘을 본다.

 

돌담 밖의 송아지가 음~매하고,

나무가지에 묶여져 간신히 버티고 있는 하얀 광목텐트 아래서 잠들었던 애기 우는

소리가 점심시간임을 알린다.

점심시간은 모두에게 더 없이 즐겁고 행복한 시간이다.

어미소도 먹이를 먹고, 송아지도 어미젖을 빨며 신나게 젖무덤에 박치기를 해 댄다.

애기도 엄마 젖을 빨며 방긋이 웃는다.

커다란 밥채롱에 가득 담긴 보리밥,

물외를 숱가락 날개로 쳐 넣고 된장 풀어놓은 미지근한 냉국,

계란넣은 지실볶음,

콩잎과 풋고추,

방금 아버지가 담벼락에서 꺽어온 멜순 줄기,

진수성찬이다.

한 낮은 점심먹고 한시간 정도 쉴 수 있는 시간이어서 더 좋다.

커다란 제밤나무 높은 곳에는 하늘도 태양도 없다.

옆으로 길게 뻗은 큰 가지에 올라 소슬바람에 건 불리며 한 잠 잘 수도 있다.

건너편 가지엔 돗줄래 한 마리가 혓바닥 낼름거리며 경계의 눈초리로 쳐다보지만

별 무서울 게 없다. 

 

이글대며 서쪽으로 기우는 태양을 또 쳐다보지만 하루 해는 길기만 하다.

그러나, 신도 하루 해를 어찌하지 못한다.

태양이 한라산 중허리에 숨을라 치면 모두가 일손을 거둔다. 

땀과 흙으로 범벅이 된 얼굴, 손과 발..

집으로 돌아 오는 길목 내창의 물 가에서 옷을 벗는다.

고인지 오래되고 많은 땀과 흙을 싯겨 낸 탁배기 처럼 탁한 물이지만,

개구리가 뛰어 나오고 몇 마리 돗줄래가 물살을 가르며 기어 나간다.

 

구들장에 드러누워 고단한 하루를 돌아 본다.

천장 도배지 무늬가 희미하게 보일 듯 말 듯하다. 

내일은 조팥으로 가야만 한다.

조팥 일은 감저밭에 비할 수 없이 힘든 일이다.

밀린 방학숙제도 걱정이지만 책 펴기에는 어림도 없다.

서울에선 누구나 곤밥 먹고 산다는데.. 

아이는 어느새 깊은 잠으로 빠저든다.

흐릿한 각지불이 심한 끄으름을 뿜어 대며 아이의 얼굴을 애처럽게 바라본다.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