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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歲月은 지금/10 월 .

詩 - '가을 왕조' / 김영미

아즈방 2023. 10. 28. 13:30

밀양 표충사를 거쳐 천황산에 오를 때이다.

쉬어가느라 8부 능선 너럭바위에 앉아 지금껏 힘들게 오른 산 아래를 내려다보니,

겹겹이 주름진 골짝마다 굽이굽이 붉게 물든 나무들이 오색향연을 펼치고 있었다.

산 전체가 교향악단이 되어 무르익은 가을을 자축하고 있으니,

한 그루 두 그루 나무들이 부르는 노래 소리가 합창이 되어 멀리 구름까지 울려퍼지는 듯,

마침 사자평 억새밭을 건너온 은빛바람에 몸을 싣고 숲은 오른쪽으로 왼쪽으로 가볍게 출렁이고 있었다.

어-, 어-, 술만 취하는 것이 아니구나,

감흥에 겨워 절로 감탄사가 나왔다.

두 팔을 양껏 벌려 산 전체를 품안으로 들여 껴안고 한 잎, 한 잎, 이쁘구나 이쁘구나,

입맞춤을 해주고 싶었다.

방법이 없다 이길 밖에는 ..

수청을 들라-앗 !

지엄하신 명을 받아 만산의 초목들이 몸을 떨며 메아리친다

역사상 그 어느 실록에도 없는 가을왕조가 탄생하는 순간이다

다시 한 번 수청을 들라 명하는 순간.

산허리를 물들이고 있는 각양각색 단풍진 나무들이 후궁 조 씨, 숙의 안 씨, 귀인 정 씨로 변신한다.

아직 동글동글하고 애리애리한 어린 나무들은 진홍치마 발끝으로 사뿐사뿐,

몸종 삼월이, 구월이, 시월이로 변신한다.

그리고는 모두들 산정을 향해, 내가 앉은 너럭바위를 향해 부리나케 산을 타고 오른다.

억새꽃 흔들고 오는 은빛 바람결에 숲은 서로의 몸을 섞고 감빛으로 주황빛으로,

오색당의 더더욱 붉게 타오른다.

능선을 넘어가는 해님마저 마지막 혼신의 힘을 다하여 만산홍엽을 새롭게 비추니,

아- 꿈같은 순간, 화양연화(花樣年華)의 한 시절이로다

카메라가 서서히 이동하자 서책을 덮고 후원을 거니시는 중전마마가 보인다.

우수수 떨어지는 무수리들도 보인다.

좀 짜안- 하기는 하지만 원래 삶이란 양이 있으면 음이 있고 밝음과 어둠이 교차하기 마련,

가을은 고독과 우수의 계절이니 호젓이 외로움에 젖는 것도 나름의 멋,

그러니 우리 그냥 모른 체 하자.

그들은 그들의 배역을 훌륭하게 소화하도록 두고.

약간 희화화되는 위험을 무릅쓰면서 나는 지금 단풍과 놀고 있다.

내 방식으로 한껏 가을을 즐기고 있다.

우아하고 품위 있는 중전을 사랑하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결코 포기할 수가 없다.

저 만산홍엽!

저 어여쁜 여자들을 내 다 품을 것이다.

사실 다음 생이 있다면 남자로---, 하고 생각한 적이 있다.

결코 다시 태어나고 싶진 않지만, 피할 수 없는 선택사항이라면,

사랑하는 아내와 사랑하는 여인, 둘 다를 완벽하게 소화해 내는 나쁜 남자로 태어나고 싶다.

뿌리 깊은 가부장적인 사고방식에 대해 반사적으로 예민하게 굴면서도,

또한 가부장적인 삶을 누려보고 싶은 나의 이율배반적인 사고,

그 사고의 한 가닥이 살짝 이 시에 투영된 것 같기도 하다.

어쨌거나 아- 재밌다!

내가 세운 나라에서 왕질하는 거,

산과 들 전부를 내 수하에 두고 하늘의 해님까지 도승지로 부리는 재미!

왕조실록 오백 년 역사를 시 한 편으로 완전 다 섭렵한 기분이다.

가을은 명실공히 내게 있어 화양연화의 한 시절이라.

그 가을이 다 가고 있다.

쇠락하고 있다.

삼월이 시월이 벗어버린 노랑저고리,

귀인 장 씨 숙빈 조 씨 벗어던진 진홍 치마,

나무둥치 아래 수북이 쌓여있다.

채 여밀 사이도 없이 누구의 흑자주빛 옷고름인가 부는 바람에 서 너 차례 회오리 상모를 돌리더니,

우루루 길 끝으로 몰려간다.

석양에 긴 그림자 늘이고 섰는 나무들 가지마다 차츰 빈 허공들이 걸리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