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시궐(幹屍厥) / 맹난자
수세식 변기를 쓰면서부터 물을 내리기 전, 마주하게 되는 것이 있다.
자기가 내놓은 배설물이다.
사십여 년 동안 무의식적으로 지속된 이러한 행동,
그러다 어느날 문득 '나는 기껏해야 똥싸는 기계가 아닌가'하는 회의가 들었다.
그러나 그것을 내놓지 않으면 살아 있는 것이 아니다.
그때 별안간 운문(雲門)선사의 '똥막대기'가 생각났다.
'부처가 무엇입니까?' 하고 제자가 물었을 때,
운문은 거침없이 '간시궐(幹屍厥:똥막대기)' 이라고 답했다.
그는 왜 존귀한 분〔世尊〕이시며 청정한 분을 더러운 똥막대기라고 했을까?
궁금해 하다가 깨끗한 것과 더러운 것의 차별이나 편견을 갖지 말라는 것쯤으로 넘기고 말았다.
'부처와 똥막대기' 그 후 '간시궐'의 화두가 나의 발목은 잡은 것은,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실현한다'는 붓다의 말씀 때문이었다.
몸, 몸이란 사실 얼마나 더럽고 무상한 것인가?
아홉 구멍에서는 항상 더러운 것이 나오고 마침내는 늙어 한 줌 재가 되는 무상한 몸.
그 몸을 가지고 최상의 진리를 실현해야 한다니….
그동안 나는 몸보다 정신을 더 숭상하고 우대해 왔었다.
종교적 금욕도 몸의 학대로 나타나지 않았던가.
그리스 철학자 플라톤은 '몸은 영혼의 감옥' 이라고 말했다.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는 '몸을 떠나서는 영혼도 존재할 수 없다' 고 설했다.
그렇다면 몸이 더 중요한 것인가.
어느새 나는 따뜻한 물 한잔의 소중함이 간절해지는 나이가 되었다.
마른 목을 적시는 물 한잔의 수분과 온몸으로 번지는 따뜻한 온기가 움츠렸던 몸을 일으켜 세운다.
나보다도 먼저 몸이 반가워라 한다.
칠십 중반을 넘어서니 몸이 의지대로 되지 않는다.
몸의 통제를 받으며 나는 요즘 몸으로 살고 있다.
아니 몸과 타협하며 몸을 따라가고 있는 형편이다.
그때,
'나는 고스란히 몸이며 그 외에는 아무것도 아니고 영혼이란 몸에 딸린 무엇인가를 위한 말일 뿐'이라던 니체가 떠올랐다.
'나는 완전히 온몸 전체로 병을 앓고 있다'면서 그는 생의 비약과 환희, 이런 것들을 놓치지 않으려고 애썼다.
고압 전류가 흐르듯 손가락에 말초혈관신경증의 통증이 밀려오면 나는 병상의 그를 떠올리곤 했다.
1년에 200일이나 두통으로 괴롭힘을 당할 때도 있었고,
쓰는 일, 읽는 일을 할 수 없어 방에 틀어박혀 고통을 견딜 뿐이라고 했던 그의 절망을 껴안게 된다.
뇌매독으로 인한 골수막염, 각혈을 동반한 위경련, 편두통 등 니체의 몸은 그야말로 고통의 둥지였다.
그러면서도 실제로 있는 그대로의 자신에 만족한다고 말했던 그를 생각하게 된다.
'몸을 경멸하는 자들에 관하여' 라는 제목이 붙은 글에서 그는 짜라투스트라의 입을 빌어, '고스란히 몸인 인간이 근원적이며 궁극적으로 깬 자'임을 역설한다.
나는 이 대목에서 한참을 멈춰 있었다.
어딘가를 향해 그에게 합장이라도 하고 싶었다.
'몸으로 최상의 진리를 실현한다' 는 붓다의 말씀과,
그의 '몸인 인간이 궁극적으로 깬 자〔覺者〕'임을 역설한 그것이 다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짜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그것은 더욱 구체적으로 되고 있다.
'…너의 사고와 감정 뒤엔 나의 형제여!
힘센 명령자 알려지지 않은 한 현자가 있으니,
그것이 곧 자신이라 불리는 것이다.
네 몸속에 그것이 살고 있고 그것이 곧 네 몸이다.'
내 몸속에 살고 있는 한 현자(賢者), 주인공.
그 '본래면목(本來面目)'을 니체는 그렇게 지칭했던 것이다.
죽되 죽지 않는, 생멸(生滅)을 초월한 한 물건.
우리가 본래 갖추고 있는 진실한 모습, 실상(實相)인 것이다.
'부처와 똥막대기'
청정(淸淨)과 부정(不淨).
운문은 이분법의 차별을 떠나 똥막대기에서 그대로 청정법신불을 뵙는다.
이 질병 덩어리, 색신(色身)이 그대로 청정법신임을 말하고자 한 것이 아니었을까.
본래면복도 몸이 있는 이곳일 터, 결국은 몸을 통하여 몸에서 그것이 드러난다.
몸은 해탈의 도구이다.
붓다가 제시한 사념처(四念處)의 수행은 덧없는 몸의 부정관(不淨觀)으로부터 시작한다.
몸이나 느낌 따위를 있는 그대로 관찰하다 보면 마침내 사성제(四聖諦)라는 고귀한 진리를 실현하여 궁극의 완성에 이르게 되는데, 마지막 멸성제(滅星諦), 갈애(渴愛)의 남김 없는 소멸로 완전한 깨달음(니르바나)에 이르게 되나니 이를 두고 붓다는 '몸으로 진리를 실현한다'고 한 것이리라.
여기 오갈 데 없는 한 노파가 앉아 있다.
그는 자신이 미구에 죽으리라는 것도 알고 있고,
죽되 죽지 않는 한 물건(一者)이 안에 들어 있다는 것도 알고 있다.
아이들이 갖고 노는 형형색색의 비눗방울에서 순간에 사라지고 말 자신의 모습을 바라보기도 한다.
또한 변기에 물을 내리기 전, 마주치게 되는 똥에서도 자신을 직시한다.
운문의 '간시궐'을 통해 무상(無常)하고 깨끗지 못한 이 몸이 그대로 법신(法身)임을 알아차리게 된다.
몸을 기반(基盤)해서 정신의 각성(覺醒)도 일어난다.
남루한 이 몸, 그대로 고맙다.
아! 날은 춥고 어두운데 빈 나뭇가지에 꽃송이라도 달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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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념처(四念處)
마음을 한 곳에 집중하여 잡념 망상을 막고 진리를 체득하는 네 가지 수행법
① 신념처(身念處) - 육신은 부정(不淨)하다고 觀함.
② 수념처(受念處) - 감수작용은 모두 고(苦라)고 관함.
③ 심념처(心念處) - 심(心)은 무상하다고 관함.
④ 법념처(法念處) - 일체 존재는 무아(無我)라고 관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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