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을 / 모윤숙
매미의 긴 시름도 언덕 맡에 가버리고,
하늘 기슭에 떠도는 기러기 비명이 달비친 새벽창가에 외로운 메시지를 던지고 간다.
잎 지는 소리도 이 밤은 더한층 처량히 들려 내 맘은 어두웠다 밝았다 하여,
지향 없이 떨고 있다.
가을은 젊은 가슴에 회색 강을 파고 이름 모를 추억을 끌어준다.
나는 푸른 6월의 품도 좋아하거니와,
갈색 황혼 아래 외로이 산기슭을 헤매는 낙엽의 가을도 좋아한다.
삶보다 죽음, 그리고 화혼식(華婚式)보다 상가의 곡성을 따르는 이 심리이기에,
나는 무성한 여름의 풍부한 여름보다 헐벗어 쫒김 받는 가을 잎새에,
나의 맘은 항상 끝없는 애착을 느낀다.
이것은 성격의 비애라 할까?
운명의 슬픔이라 할까?
윤택하지 못한 혼이 곳곳마다 터지는 비극의 생가에서,
인생을 엿보고 역사를 공부하려는 괴이한 자신으로,
그러기에 가을은 나의 앞에 커다란 무덤을 상징하는 반면에,
불멸의 신비성과 영구한 소생의 진리를 가르쳐 주는 시절의 조화다.
나는 인생의 가을 고개를 경험해 보지 못한 애송이 풀잎이다.
그저 계절이 바뀔 때마다 내 체험을 통하여 심장에서 저절로 솟는 센티멘탈리즘에,
까닭 모를 슬픔이 있었을 뿐이다.
가을은 아름다운 여인의 울음이다.
뼛속까지 싸늘히 사무치는 그 울음을 들을 때마다,
위대한 계획이나 하려는 듯이 주먹을 불끈 쥐게 된다.
아련한 봄날은 나에게 효과 없는 공상을 제공하나,
정 없는 가을은 나에게 자립적 인격의 토대를 부축해 주는 은혜로운 아버지시다.
가을은 사색의 심연이다.
영원을 마음으로 창조하고 건전한 이상을 작은 가슴 속에 뜨거이 담아,
내일을 이룰 수 있는 준비 시기다.
사색이 없는 민족, 사색이 없는 여성은 언제나 광명한 날을 스스로 보지 못한다.
나는 얼마나 무사색한 존재인고?
나 자신을 모르고 세상을 정당히 비판할 줄 모르고,
구름에 몰려 헛된 천지에 방황키 그 몇 해련고?
나를 위한 탄식보다 남의 탄식을 구경하며 울며 살던 내가 아닌가?
이 머리에서 살아나던 사색의 나무도 나의 생이 다하는 날 고목과 같이 쓰러질 것이어늘,
어찌 나는 푸른 나의 사색의 봉우리를 어루만질 줄 아는가?
이렇게 무감각한 세월 속에 내 삶이 밀려 들어감은 괴로운 일이다.
모든 것은 간다.
친구가 가고, 사랑하던 사람도, 이름도 가고, 다 가나,
나는 오직 나의 동경과 희망이 담겨있는 천지만은 놓치고 싶지 않다.
가을과 함께 나는 또다시 나를 일어나라 소리치고 싶다.
내 주위, 내 사회에는 나를 일어나 채찍질해주는 선인은 아무도 보이지 않는다.
누구를 희망하랴?
오직 스스로의 도움뿐이다.
홀로 자신을 생각하는 데에서 발하는 힘이 아니고는,
만족한 희열을 얻을 수 없는 것이 자조(自助)의 무게 있는 비밀이다.
저렇게 높고 깊고 푸른 하늘을 쳐다볼 때 무한대한 희망에 마음은 아득히 떨고 있다.
내 사색의 길이와 높이는 너무 젊고 낮지 않은가?
귓가를 흔들고 지나가는 가을 소리,
그는 확실히 나의 잠든 영혼을 깨우는 신의 신호다.
모윤숙(毛允淑. 1909~1990)
함남 원산 출생
호 嶺雲.
신문기자, 시인, 수필가, 정치인
시집 《빛나는 지역》,
산문 시집《렌의 애가》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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