탁주(濁酒) / 권선희
포구 하나를 통째로 삼켜보겠다고 덜컥 보따리를 쌌다.
가서 한 3년 살아주면 당연히 시집(詩集) 한 권 정도는 너끈하게 안겨줄 거란 믿음,
그것은 도대체 어디서 온 것이었을까.
서른 중반에도 여전히 철이 없었던 것을 증명하는 대목이다.
2000년 3월 24일, 갯비린내 물큰한 구룡포에 이삿짐을 풀었다.
환상적인 바닷가 언덕 위의 하얀 집이면 얼마나 좋으랴만,
현실은 매암산 골짜기 엘리베이터도 없는 낡은 아파트 6층 꼭대기였다.
베란다에 서면 바다는 아주 먼 데서 출렁였고, 주변은 갈대 무성한 논인지 밭인지 모를 나대지로 둘러싸여 있었다.
골목 평상은 봄이 깊도록 탕탕 비었으며, 밤이 오면 지상의 불은 모두 꺼지고 별만 총총했다.
눈만 뜨면 포구를 어슬렁거렸다.
귀를 대는 곳마다 잡다한 이야기가 살았기 때문이다.
다행히도 전생에 뱃사람이었는지, 뱃사람 각시였는지 쌓인 그물에서 나는 고릿한 냄새가 좋았다.
식전 댓바람부터 머리칼 쥐어뜯으며 싸우는 어시장 아낙들도,
동동거리며 피는 접시꽃과 애꿎은 바위에 시비를 걸어대는 지랄스런 파도도 마냥 좋았다.
넝마주이처럼 뭐든 보고 듣고 주워다 적는 날들이었다.
그러던 중 우연히 술도가 이야기를 듣게 되었고, 발길은 자연스레 ‘까꾸네’라는 탁줏집으로 이어졌다.
할머니는 주문도 하기 전에 막걸리 두 병에 사이다 한 병을 콸콸 부은 양은 주전자를 먼저 내밀었다.
그러고는 주섬주섬 안주를 내어오셨는데 그 종류가 예닐곱 개는 족히 넘었다.
마른 멸치와 고추장, 껍질을 쓱쓱 벗긴 오이, 시래기 고등어조림, 바다풀 장아찌,
두툼하게 부친 계란말이와 찐 미주구리까지 그야말로 푸짐한 바다였다.
옆 탁자 사내들의 격한 사투리에 움찔움찔하며 마시는 막걸리 맛은 일품이었다.
더욱 놀라운 것은 그 안주가 모두 공짜였다는 것.
탁주 한 병에 1,500원, 사이다가 1,000원이니 4,000원을 넘는 날이 드물었다.
어쩌다 배가 터지도록 두 주전자를 비우는 날이 있었지만 그래 봤자 8,000원을 넘지는 못했다.
그렇게 입에 대기 시작한 탁주는 술시마다 내외를 불러냈다.
오후 대여섯 시 포구의 풍경과 알싸하게 넘어가는 시큼 달곰한 맛과 둘러앉은 이야기들이 버무려지는 시간은
완벽한 조화였다.
나팔처럼 귀를 벌리고 참 많은 이야기들을 훔쳐 들었다.
목구멍이 포도청인 사내가 선금 당겨 배를 탄 사연이며,
고래배 선주의 돌림노래 같은 회고며,
뜨내기 작부를 사랑해 번 돈 다 뜯기고 총각 머구리로 늙어가는 처량한 사연까지 꼬불치고 돌아와 새김질하는
재미 쏠쏠했다.
비가 추적추적 내리던 어느 날, 탁줏집에 드나드는 사람들은 눅눅한 비린내를 풍겼다.
남편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질문이 넘어왔다.
“야, 야, 니는 어데서 왔노?” 옆 탁자에 앉았던 영감의 그 물음이 ‘너는 어느 다방에서 왔노?’라는 의미였다는 걸
한참 후에 알았다.
서른 후반쯤 되는 노랑머리 여자가 낯선 사내와 나날이 막걸리를 퍼마시고 앉았으니 당연히 다방 레지로 보였던
것이다.
그날에서야 남편은 촌다방 레지를 불러내 막걸리를 마시는 놈팡이에서 ‘중대장(남편은 예비군 중대장)’으로,
나는 ‘중대장 각시’로 새로운 이름을 얻게 되었다.
끼어들 자리가 생겨나고 불러주는 이웃이 생겨났다.
풍어기와 흉어기 사이사이 가가호호 소설 같은 내력도 만났다.
원주민 깊숙이 받아들여지는 동안 나의 탁주량 또한 급격히 늘었다.
덕분에 몸이 불어 모양새는 장군마냥 우람해졌지만 졸편만은 차곡차곡 쌓였다.
바닷가에 살다 보니 하나둘 동무들이 찾아왔다.
간혹 낯선 독자들도 몰려왔다.
보리누름이면 꽁치 구우며 보리밭에서 놀고,
백고동 오르면 따끈하게 쪄서 방파제로 갔다.
샛푸른 바다를 향해 하얗게 쓰러지는 탁주 병만큼 추억은 쌓였다.
탁주는 나에게 이 포구를 열어준 열쇠였고 견디게 한 부적이었다.
총과 덫을 다 내려놓게 한 품이었다.
아, 어김없이 가을은 와서 밤마다 어화(漁花)가 수평선을 총총 깁기 시작한다.
우짜든동, 한잔해야만 할 시절이다.
권선희
1965년 강원도 춘천에서 태어났다.
시집 《구룡포로 간다》, 도보여행기 《대한민국 해안누리 길: 바다를 걷다》(공저), 해양문화집 《뒤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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